'무소불위' 검찰은 어떻게 탄생했나?
어쩌다 인권을 둘러싼 환경이 이렇게 나빠졌는가.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우리는 함께 해냈다. 추운 겨울을 넘는 일이 간단치 않았지만,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10월 29일 첫번째 촛불을 들었을 때, 우리는 오늘이 올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도전' '불가능한 꿈'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촛불의 주장이 이루어질지 걱정하던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회의하던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믿지 못했던 존재들에게 분명한 답을 보여주었다.
문 후보의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문 후보 나아가 더불어민주당 내지는 우리나라의 현재 야권 및 진보세력의 안보관에 대하여 중도 내지는 보수적 유권자들이 의구심을 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정당이 집권하던 시절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간에 시행되었던 대북 유화책인 햇볕 정책의 실패, 그리고 북한의 거듭되는 핵실험 및 탄도미사일 등의 미사일 발사시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면 북한에 먼저 가겠다는 입장, 송민순 전 외교부장관의 회고록 논란 등등이 그런 의구심을 더욱 강화시켜서 결국 중도 내지 보수적 유권자들이 선뜻 문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국민은 자녀로 은유될 수 없다. 대통령이 아버지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며, 공화정이 어머니인 것도 아니다. 국가는 가정의 확장판이 아니다. 언론과 지식인들이 시국을 개탄하는 목소리를 내준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원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을 존중하자는 변호사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여자 대통령을 공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발언을 하며 동성애자들을 사회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며 심각한 차별이자 폭력이다. 결국 '동성애자를 혐오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 평등, 민주주의, 평화 등 이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 원칙 자체를 부정하는 셈이다. 인간을 혐오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듯, 바로 그 이유로 동성애자를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2~3년을 죽을 고생 해야 손에 쥘 수 있는 '꿈의 돈' 5000만원은 홍만표·최유정 변호사가 전화 한 통으로 받는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최 변호사의 죄질이 나쁜 이유는 오피스텔·상가를 100채 넘게 갖고 있다거나 수임료 100억원을 벌어들인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 세금으로 검사·판사 월급 받으며 배우고 익힌 노하우를 유감없이 재활용했다.
가령 20세기의 전체주의 정부들을 추동하고 추인했던 기만의 선봉에는 늘 지식인들이 서성댔다고 관찰한 조지 오웰은 변화의 동력은 오직 보통사람들(의 품위)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그가 한 꼬마가 거대한 짐마차 말(馬)을 마음대로 부리는 것을 보고는, 동물이 자신의 힘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결코 그들을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며 냉소했을 때, 그는 바로 그 점을 빗대고 있었다. 우리는 4·19혁명, 부마 투쟁, 6월 항쟁 등 한국 현대정치에서 격변의 전기를 마련했던 사건들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정부는 심지어 국정교과서 집필진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공개되면 테러라도 당할 것을 우려하는 걸까. 도대체 학자라는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비공개의 장막 뒤로 숨는가.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 봐서 거리낄 게 없다면 국정 교과서 집필진의 영광을 드러내고 축하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다양한 이유로 <애국가>가 국가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논란은 1960년대부터 있어왔다. 국가가 새로이 제정되어야 한다면 나는 단연코, 새로운 곡을 만들 필요도 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우리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맞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더 장엄하고 보편적으로 이 헌법의 정신을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하태경 의원은 말한다. 이 노래가 폭력적인 집회를 연상하게 하므로 공식적인 자리에선 적합하지 않다고. 그러나 미국이나 프랑스 국가의 가사와 견준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너무나 문학적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하면서 이른바 '혁명공약'을 발표했고 그 마지막에서 참신한 민간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으로 복귀하겠다는 취지로 천명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최종적으로 스스로 군복을 벗고 직접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이런 약속을 어겼고("이 땅에 나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드립을 전역식에서 치더니만 뒤로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키웠;;) 군정 3년 간에도 여러 번 약속을 번복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풍조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박정희의 이러한 민정이양/군정연장 공약의 잦은 번복이(이승만의 서울사수 녹음방송과 함께)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고 이게 박정희의 가장 큰 적폐; 중 하나라고 하겠다.
분노가 작가를 만든다. 작가 디킨스의 분노의 대상은 사회였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행한 아이지만 부모를 탓할 수 없는 분노가 사회제도에 과녁이 맞추어져 있다.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디킨스도 정규교육은 짧았지만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지식과 경험의 축적에 정진했다. 또한 그는 작가로서의 전 생애를 통해 강한 실험정신에 충만했다. 어떤 주제는 작품 속에 반복하여 제시되면서 깊이와 세련미가 더해지고 사회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을 담아내었다.
얼마 전 대학을 휴학하고 알바를 하고 있다는 대학생을 만났다. 자신이 알바해서 버는 돈으로 필요한 데 쓴다. 대학을 다니다가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는 모양인데, 아무런 경제적 기반이 없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석유 판매에서 나오는 돈으로 주민들에게 매년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다. 만약 이 대학생이 알래스카주에 살고 있다면, 2014년 1884달러를 배당금으로 받았을 것이다. 주민의 자격으로 받는 배당금이다. 알래스카 모델은 흔히 반론에 부딪힌다. 알래스카는 석유가 나오니까 이렇게 배당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다. 석유 같은 지하자원이 없는 곳에서는 이런 발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