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와 가장 많은 시간 보낸 그 장소에서.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퀸에 대한 반응은 예고편이 처음 공개됐을 무렵부터 이미 폭발적이었다. 작년 핼러윈 파티는 영화 속 캐릭터처럼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울긋불긋한 화장을 한 여성들에게 점령되다시피 했다. 아마 올해 핼러윈 때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원작의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광대 같은 모자를 뒤집어쓴 만화 속 할리퀸은 영화의 묘사와는 꽤나 차이가 있다. 한 인터뷰에서 마고 로비는 지금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밝혔다. 답은 밴드 '블론디'의 리드 싱어였던 데비 해리다.
뮤지션이자 배우인 톰 웨이츠는 이른바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자신보다도 유명한 팬들을 잔뜩 거느리고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영화감독 짐 자무시는 "톰 웨이츠의 음악을 모른다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잃고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엠마뉴엘'이 다시 궁금해진 건 몇 개월 전 우연히 발견한 스틸 때문이다. 세 명의 남녀가 긴 의자에 늘어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2편의 한 장면이었다. 부드러운 크림색, 다양한 질감의 갈색, 액센트가 되어줄 푸른색 정도만 사용해 섬세하게 설계한 화면이 예사롭지 않았다. 실비아 크리스털이 입고 있던, 기모노를 응용한 듯한 담백한 디자인의 갈색 셔츠 드레스는 우아하면서도 섹시했다. 결국 20년 만에 이 시리즈를 다시 감상했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배우들의 맨살보다 입고 있는 옷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얼마 전, 흰 드레스 셔츠를 입어야 할 자리가 있었다. 옷장 깊은 구석에 걸려 있던 옷을 오랜만에 꺼냈다. 걸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동안 내가 이 셔츠를 방치했던 이유가 새삼스럽게 생각이 났다. 문제는 젖꼭지였다. 다른 말로는 유두, 얇은 한 겹 너머에서 필요 이상으로 선명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 개의 점. 그날은 실내에서도 재킷을 벗을 수가 없었다. 속옷을 챙겨 입으면 되는 일 아니냐고? 내게 젖꼭지보다 더 감추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셔츠 아래의 '난닝구' 실루엣일 것이다.
은근히 다양한 색상을 시도하는데도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채도가 낮은 차분한 컬러 위주로 선택하고, 엇비슷한 톤을 함께 매치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이 자신의 집에서 의상을 고르는 장면은, 잘라내서 남자들의 스타일링 가이드 비디오로 삼아도 될 정도다. 그는 흐린 카키색 셔츠 위에 같은 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타이를, 그리고 푸른 셔츠 위에는 남색 타이를 얹어본다. 심지어는 살인 누명을 쓰고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러 다닐 때도 컬러 배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당시의 위노나 라이더는 시대를 막론하고 각광받는 클래식 아이템을 갖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젊음 말이다. 영화 속 스타일을 완성한 건 인생에서 잠깐만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액세서리였다. 물론 나는 40대에 접어든 현재의 위노나 라이더도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청춘'이 그에게 특별할 만큼 잘 어울렸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금발이 섞인 붉은 머리를 하고 오드 아이(홍채이색증·양쪽 눈동자의 색이 다른 눈)를 번뜩이며 창백한 무표정을 짓는 데이비드 보위는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피사체다. 수도복 같은 무채색의 슈트를 걸치고 있을 때도 그는 신분을 감춘 지기 스타더스트처럼 보인다.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 아이템으로 완성한 스타일링이 오히려 이 남자의 이질적인 존재감을 강조한다는 느낌도 든다. 40여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데이비드 보위만은 시대에 걸맞지 않게 세련된 모습이라 마치 2010년대에서 탈출한 시간 여행자 같다.
'베티 블루'는 첫 장면부터 확실하게 기선 제압을 한다. 주인공인 조르그(장위그 앙글라드)와 베티(베아트리스 달)의 전라 섹스신은 관객들로 하여금 숨쉬는 걸 잠시 잊게 할 만큼 대담하고 솔직하다. 게다가 충격적인 첫 등장 이후로도 두 배우는 툭하면 옷을 벗어젖힌다. 초시계로 재보지는 않았지만 벌거벗은 채 연기하는 분량이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는 될 거다. 그렇다고 해서 의상 감독을 맡은 엘리자베트 타베르니에가 촬영 기간 내내 한가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면 곤란하다.
나는 해리 파머가 살인 면허를 지닌 바람둥이 스파이보다 더 세련된 취향의 소유자일 거라고 확신한다. 과연 본드가 직접 쇼핑을 하기는 할까? 머니페니(비서)가 옷장에 채워준 고급 슈트를 가격표도 확인하지 않은 채 꺼내 입는 건 아닐까? 게으른 마초이즘이 남성적인 매력으로 여겨지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자신에게 어떤 차림이 어울리는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에게는 어떤 요리를 해줘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해리 파머는 제임스 본드로부터 영화 역사상 가장 섹시한 스파이의 타이틀을 빼앗아올 자격이 충분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워스트 드레서는 따로 있다. 바로 빌 머리다. 그의 취향은 기발한 지경을 넘어서서 종종 괴팍하기까지 한데, 특유의 시큰둥한 캐릭터와 과감한 시도가 충돌하는 광경이 은근히 재미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이 배우는 알록달록한 우산이 달린 모자를 쓴 채 골프를 치곤 한다. 올해 초에는 핑크색 드레스에 카우보이모자와 부츠를 착용하고 텔레비전 토크쇼에 등장했다. 그는 패션 금기를 종류별로 섭렵하는 일종의 스타일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슬래셔 호러의 괴물들은 대체로 이렇다. 검은색을 선호하고 그 외의 경우라 해도 화려한 색상은 되도록 피한다. 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며 답답할 정도로 말을 아낀다. 기숙학교의 교복만큼이나 보수적인 드레스 코드를 따른다는 이야기다. 이에 비하면 프레디 크루거는 교복을 멋대로 고쳐 입고 가톨릭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10대 시절의 마돈나에 가까운 존재감을 발휘한다. 웨스 크레이븐은 자신이 창조한 악당이 심하게 화상을 입은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도록 했다. 마스크 뒤에 숨지 않는 그는 표정이 풍부하고 수다스러우며 심지어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악마다.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을 연기한 라이언 고슬링은 거의 출연 분량 내내 이 티셔츠 차림을 고수한다. 캐릭터에게도 배우에게도 썩 잘 어울리는 의상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나는 똑같은 제품을 인터넷 장바구니에 넣고 있었다.
염색을 해보라는 권유는 꿋꿋이 거부하고 있는데 이게 다 리처드 기어와 사카모토 류이치, 폴 뉴먼 때문이다. 은발의 매력을 내게 일찌감치 세뇌시킨 이들이다. 물론 그 정도 미남들이라면 백발이 아니라 삭발을 하고도 근사했겠지만, 아무튼 요점은 이렇다. 세월의 흔적이 꼭 고치고 감춰야 하는 핸디캡만은 아니라는 것.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으나 위에 언급한 셋은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뒤에 오히려 미모의 정점을 찍었다고 본다.
패션 무지렁이 남성 한 명이 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여성의 옷차림은 어떤 것인지, 사례 수집 차원에서 들어보고 싶다면 개인적인 견해를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일단 떠오르는 건 에이드리언 라인이 연출한 영화 속의 장면들이다. 조지 밀러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로 젊은 감독들에게 액션에 대해 한 수 가르쳐준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고 이분이 다시 복귀해서 섹시함의 본때를 보여주길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