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468호 이슈 ”대중문화 인문학” - 장르문학이라는 새로운 인문학 객체
한 동료의 주동으로 연남동에 회식하러 가기로 했었다. 각개격파를 선호하는 사무실 분위기상 일 년에 몇 번 없는 회식자리. 주동한 동료가 메뉴를 정했다. 연남동에서 유명하다는 멕시코 식당에서 1차를 한 뒤 연남 공원에서 맥주 캔을 들고 산책을 한 후 노래방에 간다는 나름의 완벽한 계획이었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팔뚝만 한 서대구이와 생물 병어조림과 민어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을 근방에 놔두고 타코나 뜯는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오쓰카 에이지는 대형출판사의 매출에서 만화와 순(정통)문학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면서, 만화와 같은 장르문학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순문학을 향해 '불량채권'이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도 순문학과 장르문학 사이의 주도권 교체를 문학의 돌파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오쓰카 에이지와 순문학계 사이에 세워진 긴장은 어느 장르가 오늘의 대세인가를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귀여니는 『그놈은 멋있었다』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다. 몇몇 작품이 눈길을 끌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안타까운 건, 지금까지도 이런 류의 스토리가 문학이 아닌 저급한 콘텐츠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미스터리 문학이 이에 포함돼 있었다. 지금에서야 히가시노 게이고 등 유명한 일본 작가들 덕에 조명 받고 있는 듯하지만, 이미 늦었다. 미스터리 분야 한국 작가는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귀여니의 승승장구에 꿈을 포기한 순수문학 작가지망생들보다 귀여니가 받은 맹비난을 목도하고 장르문학을 포기한 이들이 아쉽고 또 문학계의 큰 손실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나 파울로 코엘료처럼 순문학임을 자청하는 저열한 작가들에 비하면 제임스 엘로이나 로렌스 블록이 훨씬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비슷한 위치에 있는 두 개의 산이 같은 땅덩이로 이어져 있다 해도 둘은 결국 다른 산이다. 마찬가지로 추리 소설과 순문학 역시 양쪽 모두에서 정수의 근처에도 못 가본 어설픈 작가들 때문에 경계가 잠시 흐려 보일 수는 있겠으나, 엄연히 다른 산이 아닐까?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면 문학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봉우리의 높이가 꽤 차이 나는 것 역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