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면 연기 패션이면 패션!
성소수자 자녀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한 엄마의 모습
서예지를 옹호하려다 '여배우' 집단 전체를 비하했다.
시급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일만 힘들어지는 날
국회의원의 지위를 이용해 산하기관에 자신의 "시집"을 카드 단말기까지 의원실에 갖다 놓고 팔았던 이가 이제 북경의 "시인" 노영민이 될 판이라니, 역시나 마르크스가 헤겔을 빌어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얘기한 대로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되는 모양인가 싶어 쓴웃음마저 난다.
아름다움은 곧 자신과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파악의 깊이다. 빈약한 사유를 가리는 미사여구를 구사하는 것, 기발한 표현과 문장을 창안하는 것, 독특한 비유법과 상징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몸체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된다. 말을 갖고 노는 재주는 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러나 이런 '언어적 장치'들은 아름다움의 곁가지다. 아름다움은 곧 깊은 앎의 문제다. 미당시는 그런 아름다움에 이르는가. 그렇지 못하다. 나는 한국문학의 큰 공백으로 (문학적) 지성의 빈곤을 지적해왔는데, 미당시도 예외는 아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깊은 지성의 다른 표현이다.
등단 2년 후인 1988년 정부는 월북문인들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금서에서 해제하였다. 88올림픽대회를 앞두고 국제여론을 의식한 정치권력의 정치적 결단이었다. 이를 계기로 영인본으로 찔끔찔끔 만났던 임화와 백석과 오장환과 이용악과 박세영의 시를 시집으로 보게 되었고, 그동안 내가 배운 현대문학사가 반쪽도 안되었음을 깨달았다. 임화의 시 「우리 오빠와 화로」나 「네거리의 순이」를 읽어가면서 울컥하기도 했다. 나는 과문한 탓으로 이런 선배 시인들을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