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일상화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국내외 기업들 개발 몰두
빠르게 혼행 트렌드를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밀레니얼이 직장인이 됐을 때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사회를 보여준다.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중 하나다.
[이민자 인터뷰⑪] 캐나다 밴쿠버 한주환
마치 '스트리밍'처럼 트렌드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소유권은 구시대의 유물일 뿐일지 모른다. 남의 것을 손쉽게 빌려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은 굳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글에서 우리 세대 중 일부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책임의식을 느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그 노력도 무시할 순 없지만, 사회경제적 환경에 기인한 '운'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고도성장기인데다 대학진학률이 20%도 안 되었다. 지금은 저성장시대인데다 대학진학률은 80%가 넘는다. 그러니 대학을 나온 사람을 기회란 측면에서 비교할 때 과거와 지금은 비교하기 힘들다. 사실 내가 지금 대학을 나왔다면 언감생시 대학교수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이들은 어린 시절 대부분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면서 공부했다. 그래서 이름께나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소싯적 애절한 이야기는 하나씩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성장의 대가를 톡톡히 받고 산 사람들이다. 누구나 공부를 하면 금수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살았던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70년대 초 중반 대학을 다닌 분들이 지금 어떻게 사는지. 그들 중 상당 수는 은퇴 후에도 큰 걱정이 없다. 강남의 집은 이미 십 수 억으로 불어났고 연금은 혼자 쓰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세대는 과거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 생애 초반 20년 고생하고 그 이후 60년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세대니 젊은 시절 고생담은 그저 추억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정치공학을 따져가며 시간을 끄는 것이 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당신들은 절대로 '원칙'을 중시하는 '우파'가 아님을. '우파'라면 더더욱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주변에서 우파의 이름 하에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에게 죗값을 확실히 물어야 한다. '원칙'과 '진실'을 외면한 '봉건 정권'의 과오를 정리하지 않고 돌아오는 대선을 이겨봤자, 그것은 또 다른 '봉건 정권'의 연장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대선에서 우파진영이 패배한다 하여도, '진실'을 마주하고 '원칙'을 지키며 얻은 패배가 다시 찾아올 '떳떳한 승리'의 밑거름이 될 '값진 패배'라고 믿는다.
60년대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세상이 쉬웠다. 물론 개개인이 처한 환경에서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노력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내 말은, 하나의 코호트로 봤을 때 그들은 다른 코호트들보다 쉬운 세상을 살았다는 거고, 어려운 환경조건이라 그렇지 다른 세대 역시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거다. 한국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를 열심히 살면서 성공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세대 =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혹은 똑똑하지 않은) 세대'라는 논리적 오류가 그 코호트에 존재한다.
취준생들 대다수가 한결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내게 일이란 무엇이며, 평생을 함께 하고픈 직무가 무엇인가?" 거의 9할이 '노답'이거나 '노확신'이다. 대개는 애초에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고 싶은 것'조차도 '이미지'로 공유되고 모두가 휩쓸린다. 사실 현 세대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20대가 다 가도록 뼛속까지 세뇌교육되느라 잃어버린 '직업관'이다. 그걸 찾지 못한 게, 우리 세대 보편이 대학 가고, 스펙 쌓느라 흘려 보낸 '기회비용'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는 일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노년을 상상하지만, 바로 뒤 묵직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 여유를 위해 얼마를 모아두어야 할까? 그만큼을 모으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금융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5억원설, 10억원설, 20억원설이 머리를 스쳐간다. 나는 노후준비에 대한 질문을 바꿔볼 준비가 되었는가? '노후에 얼마가 필요한가, 그 얼마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히 폐기하고, '노후에 나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