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논란'의 근본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이다
시대정신은 ’1965년 체제’를 흔들고 있습니다.
장자연 사건, 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수사를 비켜가려 했다
'역지사지'는 굳이 진보가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개념이다. 내가 당하지 않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내 일처럼 느끼는 감수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필수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이재명 시장의 일갈에 시민들이 환호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한 편으로는 당해봐야만 안다는 정 반대의 주장 또한 대중의 환호를 받는다. 어떤 부류의 인간들은 애초부터 역지사지의 공감력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고통의 당사자와 똑같은 고통을 겪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역지사지'와 '너도 당해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한다.
최순실 일당이 범죄에 사용한 암묵적 수단은 검찰 수사와 국세청 세무조사였습니다. 청와대 지침에 따라 영혼 없는 수사를 하다가 "다리 부러진 사자에게 달려드는 하이에나 떼"(조응천 의원)가 된 검찰에 도저히 박수를 쳐줄 수가 없습니다. 반성이 빠진 검찰의 변신은 언제고 과거로 복귀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부끄럽게도 제가 몸담은 언론도 하이에나입니다. "비판 언론엔 불이익을 주라"(김기춘 전 비서실장)는 위협이 전해진 걸까요.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땐 내부자 노릇을 하다가 힘을 잃자 무분별한 의혹까지 앞다퉈 보도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를 편들던 일부 종편 패널들은 미어캣처럼 두 손을 비비며 시시덕거립니다.
참모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물러날 때를 알리는 것이다. 대통령 옆에도 눈과 귀가 있다면 직언을 해야 한다. 조원동·안종범·우병우·정호성.... 해바라기도 고민을 한다. 나는 청와대 비서진, 정무직 공무원, 친박(親朴) 의원 가운데서도 고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자녀들의 물음에 더 머뭇거려선 안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생각하고 결단해야 한다. 법무부 장관부터 입장을 밝혀라. 검찰 수사가 옳은가, 그른가.
내년 초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등 재판관 두 명의 임기가 만료된다.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장을 임명하는 것만큼 블랙코미디는 없다. 지금 시급한 일은 2선 후퇴든, 퇴진이든 박 대통령이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제 발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현실화한다면 탄핵 외길밖에 없다. 여기엔 세 가지 전제가 붙는다. ①수사 기록에 '대통령의 범죄'임이 명시돼야 한다. ②국회에서 부결됐을 때 그 후폭풍을 제도권이 감당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③여야 합의가 가능한 헌재 소장 후보가 제시돼야 한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오직 진실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있다. 샤머니즘 정치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으려면 불의한 권력을 부검해야 한다.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밤늦도록 일하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귀한 자식을 군대에 보내온 시민들의 일상이 민주공화국을 지켰다. 어차피 이 나라를 지켜온 건 대통령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의 개헌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전제 조건들이 있다. 가장 시급한 건 최순실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다. JTBC 보도에 따르면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들을 실제 연설하기 전 미리 전달받은 정황이 나타났다. 청와대와 무관하다는 최씨가 이 파일들을 왜 사무실 PC에 갖고 있었던 것인가. 대통령과 최씨는 대체 무슨 관계이고,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란 최씨 말은 또 무슨 뜻인지 시민들은 알고 싶어 한다. 결국 특검으로 갈 수밖에 없고, 특검으로 가야 한다. 대통령이 할 일은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다.
최순실을 덮기 위한 '이불 개헌'은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짓이다. 애초 박근혜의 의도 역시 개헌이 되든지 말든지 손해 볼 게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단지, '최순실 이슈'를 '개헌 이슈'로 덮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민들은 (정치인들과 달리) '개헌 이슈'보다 '최순실 이슈'에 훨씬 더 관심이 많고, 분노하고, 의혹을 갖고, 황당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민순 회고록 이슈로 최순실 이슈를 덮으려 했지만 거꾸로 최순실 이슈가 회고록 이슈를 덮어버린 것처럼, 개헌 이슈로 최순실 이슈를 덮으려 해도 결국 최순실 이슈가 다시 개헌 이슈를 덮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엔 유난히 세렌디피티가 차고 넘친다. 우선은 대통령 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씨 딸의 경우다. 승마를 하는 최씨 딸이 체육특기생으로 이화여대에 입학하려고 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걸까. 특기자 종목에 승마가 처음으로 포함된다. 모집 요강도 '원서 마감일 기준 3년 이내의 수상 내용'을 평가하게 돼 있지만 원서 마감 후 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로 당당히 합격한다. 우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입학 후 수업 불참 등으로 제적 경고를 받았는데 엄마와 함께 학교에 다녀간 뒤 학칙이 개정된다.
한국에서 '진실'은 누구 힘이 센지 겨루는 파워게임의 결과다. 보라.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 숨진 농민 백남기씨의 사인은 "병사(病死)"다. 민정수석 아들이 서울경찰청 운전병으로 선발된 이유는 "코너링이 좋아서"다.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은 비선실세가 주도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것"이다. 권력의 내부자들 말고는 누가 승복할 수 있겠는가.
김영란법은 결국 전문가들이 공정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대포에 쓰러진 농민의 사망진단서는 '병사(病死)'가 맞나. '외인사(外因死)'가 맞나. 사법정의를 지킨다는 판검사들이 왜 스폰서에 놀아나는가. 기자들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전문가들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직이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직업적 자존심만은 지키겠다는 각성이 이어질 때 김영란법은 성공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하는 건 백씨가 쓰러졌던 지난해 11월 집회 당시 경찰 지휘 책임자들(강신명 전 경찰청장, 구은수 전 서울경찰청장)의 면면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청와대 사회안전비서관(옛 치안비서관)을 거쳤다. 집회 당시 그 비서관 자리에 이철성 현 경찰청장이 있었다. 나는 청와대 비서관 경력자들이 경찰 수뇌부를 장악한 것이 백씨의 죽음과 무관치 않다고 믿는다. 구중궁궐에서 대통령과 수석들 지시에 따라 움직이던 사람을 청와대에서 나간 지 8~9개월 만에 경찰 총수 자리에 앉힌 건 경찰조직의 정치적 중립성을 무시한 것이다. 청와대의 한마디 한마디에 춤을 출 수밖에 없다.
당장 대법원을 보라. 재판에 참여하는 대법관 13명(대법원장 포함) 중 여성은 달랑 두 명 아닌가. 거꾸로 여성 대법관들 사이에 남성 두 명만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정상으로 보이는가. 지난해 여성 평균 임금은 남성의 62.8%(통계청),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3%(여성가족부). 가끔 기사화되곤 하는 '알파걸'이니 '여풍(女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착시요, 신기루다. 유리천장에 작은 균열이 갔을 뿐이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사위인 김 부장검사처럼 든든한 배경이 있거나 진 전 검사장처럼 일찍이 '진가'를 인정받은 검사들은 레드 카펫 위를 걷는다. 좋은 보직을 거치다 보니 그만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인적 네트워크도 넓힐 수 있다. 일선 검사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상위 1%의 검사들이다. 야근 후 찌개 집에서 후배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검사도 많다. 검사들이 묵묵히, 일개미처럼 일하는 동안 소수의 특별한 검사는 고급 음식점·술집을 찾아다니며 분탕질을 쳤다. 이미 국민을 배신했던 그들에겐 친구의 배신을 탓할 자격이 없다. 선량한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죄까지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지난 금요일 김수천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구속됐다.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로부터 재판 관련 청탁과 함께 1억7000만원을 받은 혐의였다. 김 부장판사 구속엔 남다른 대목이 있었다. 구속 수감되는 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영장실질심사를 포기한 만큼 영장심사 출석 사진은 있을 수 없다. 검찰 소환이나 구속 수감 때는 다른 이들처럼 검찰청 포토라인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문제는 사진 한 장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구속 장면을 가린다고 그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상징하는 최후의 특권의식,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최후의 동업자 의식이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 부회장의 자살은 한국 기업 문화와 한국 검찰, 언론의 총합인지 모른다. 지극히 한국적인 샐러리맨의 죽음인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달라질 것은 없다. 회사인간의 비애는 계속될 것이다. 제도 개혁이 아닌 일회성 수사로는 이 왜곡된 구조를 바꿀 수 없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세일즈맨의 아내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 그렇지만 그는 한 인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