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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4일 14시 03분 KST | 업데이트됨 2020년 11월 14일 14시 08분 KST

'교포 여성' 제시가 한국사회에 만들어낸 어떤 틈

제시는 경직된 한국 사회 너머 '여자가 자기 생각을 큰소리로 외치고 떠들어도 되는 세상'을 엿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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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예능 '식스센스'에 출연한 제시

2020년 하반기에 본 예능 프로그램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예능은 티브이엔(tvN) 〈식스센스〉였다. 쇼의 기본 플롯은 추리 예능인데, 출연자들은 매회 이색적인 테마의 식당이나 회사, 인물들을 찾아가 체험하면서 그중 제작진이 숨겨둔 가짜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식스센스〉 팬들이 주로 열광하는 건 쇼의 추리 요소가 아니다. 매회 공들여 그럴싸한 가짜를 만들어낸 제작진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진짜 열광하는 건 메인 엠시(MC) 유재석을 비롯한 출연자들 사이의 호흡이다. 

 

개성파 여성들에 쩔쩔매는 유재석

에스비에스(SBS) 〈런닝맨〉과 〈미추리 8-1000〉 등으로 유재석과 합을 맞춘 경험이 있는 연출자 정철민 피디(PD)는, 유재석이 개성이 강한 출연자들 사이에서 휘청거리는 순간의 웃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유재석을 제외한 〈식스센스〉의 고정멤버들은 전원 개성이 강한 여성 연예인이다. 배우 오나라와 전소민, 가수 제시와 러블리즈의 미주로 이루어진 멤버 조합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다. 1회부터 초면에 자기들끼리 가슴 사이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천하의 유재석이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게 했던 이 여성 멤버들은, 마지막 회인 8회쯤 가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유재석을 골려먹기에 이른다. 일찍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유재석의 모습이자, 일찍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호흡이다.

이미 〈런닝맨〉에서 통제 불능 예능 폭주 기관차로서의 면모를 입증한 전소민이나, 탈아이돌급 예능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는 미주의 활약도 눈부시긴 하나, 역시 〈식스센스〉의 가장 큰 동력은 제시다. 가슴을 비롯한 여성의 육체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꺼낸 것도, 매번 아슬아슬 선을 넘나드는 야한 농담을 시작한 것도, 매회 방문하는 남자 게스트들에게 “좀 조용히 해”라며 파격적인 게스트 환대의 포문을 연 것도 제시였다. 여성 연예인은 친절하거나 조신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고정관념이 아직은 다 가시지 않은 방송계에서 제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캐릭터고, 그런 제시가 열어젖힌 틈 사이로 예능 베테랑 전소민과 넘치는 끼의 미주가 비집고 들어와 활약하며 〈식스센스〉는 고유의 독특한 질감을 지닐 수 있었다. 여성 멤버로만 이루어진 ‘여성 예능’을 표방한 것도 아닌데, 여성 멤버들이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 제 욕망을 마음껏 이야기하며 쇼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예능. 〈식스센스〉의 성공 뒤에는 제시라는 전대미문의 캐릭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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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왼쪽부터 배우 오나라와 전소민, 유재석, 가수 제시와 러블리즈의 미주.

 

압권은 ‘교포 여성’ 제시의 파격

제시의 이런 캐릭터가 처음부터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엠넷(Mnet) <언프리티 랩스타>(2015)에서 ‘센 언니’라는 캐릭터를 얻고 스타덤에 올랐을 때에도, 어떤 이들은 제시의 저돌적인 언사나 격렬한 감정 표현, 넘치는 자신감이 비호감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더욱더 내밀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가졌던 한국방송(KBS) 〈언니들의 슬램덩크〉(2016)를 거쳐, 에스비에스 모비딕 〈제시의 쇼터뷰〉(2020~)와 문화방송(MBC) 〈놀면 뭐하니?〉(2019~)를 거치며 사람들은 천천히 제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 한국어가 아직 서툴러서 표현이 과격한 거구나.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라서 한국적인 위계 서열 질서에 익숙하지 않은 거구나. 그렇게 조금씩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그럴 거라며 제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중은, 이제 마침내 “저 사람은 원래 심중에 있는 말을 솔직담백하게 다 꺼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악의가 있는 건 아니구나”라는 이해의 지점까지 도달했다. 아직은 그가 ‘교포’라서 그렇다는 조건부 승인이긴 해도, 한때 사람들의 비호감을 샀던 여러 가지 요소들은 이제 제시의 개성으로 인정받는다.

 

물론 ‘교포’라서 양해를 받는다는 게 그렇게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점을 양해받는 것과, ‘쟤가 한국을 잘 몰라서’ 그렇다고 무시받는 것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 사람은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종종 구사자의 지적 수준과 인격을 가늠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하곤 한다. 그 탓에 한국어가 서툴러서 통상적인 한국어 표현과는 거리가 있는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한국어 화자들로부터 은연중에 무시당하는 일이 잦다. 제시가 최근 예능에서 입버릇처럼 “교포 무시하지 마”라고 말하는 건, 자기 생각이나 내면이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일을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쟤는 외국에서 자라서 문화가 다르니까’라고 양해받는 것 또한 그렇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는 ‘쟤는 한국인이니까’라는 시선을 받고 한국에선 ‘쟤는 미국인이니까’라는 시선을 받는 일이 잦은데,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주류 사회로부터 일원으로 인정받는 대신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일이 달가울 리 없다.

그럼에도 제시는 자신이 보수적이고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 자기 생각대로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 자신이 ‘교포’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겉치레나 가식을 싫어하고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성격이나,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지만 그 통제권이 상대나 (남성) 대중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는 태도 같은 것들은, 자신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예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시라는 개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기보단 ‘교포’라는 프레임으로 허용하는 쪽에 가깝지만, 사람들은 제시라는 틈을 통해 경직된 한국 사회 너머 여자가 제 생각을 큰소리로 외치고 떠들어도 되는 세상을 엿본다. 그리고 이제 제시는 그 역할을 굳이 피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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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예능 '식스센스'에 출연한 제시

 


“언니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절친 에릭 남이 진행하는 영어 팟캐스트 토크쇼 〈에릭 남의 케이팝 대박〉(KPOP DAEBAK with Eric Nam)에 출연한 제시는, “사람들이 널 좋아하는 건, 네가 사람들이 다들 생각만 하지 입 밖으로 꺼낼 엄두는 못 내는 말들도 하는 사람이란 점 때문인 것 같아. 그게 신선한 거지”라는 에릭 남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게 내 일인 것 같아. 여자로서, 교포로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자로서. 아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이든 어디든 여자는 설 자리가 적어. 무슨 직업이든 아직 남성 중심적인 면이 강하거든. 그래서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아. 내가 한 말 때문에 어떤 욕을 듣게 되더라도, 이게 나니까. 그걸 바꾸진 않을 거란 거지. 다른 여자들이 나한테 와서 그런단 말이야. ‘언니, 나도 언니처럼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회는 보수적이고,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배우며 자란 게 아니니까. 다른 여자들이 나한테 ‘넌 겁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사실 나도 겁나. 하지만 난 언제나 나 자신에 충실하게 살려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란 게 기뻐.”

제시는 자신은 보컬리스트지 래퍼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가서 여성 래퍼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무대를 여는 데 기여했고, 자신은 아티스트지 예능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예능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터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이제 제시는 자신이 자기 주관을 지키며 더 솔직하게 사는 모습으로 대리만족을 주는 것을 넘어, 다른 여성들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걸 보여주는 존재가 됐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긴다. 그는 사회운동가도, 어떤 이즘을 내세우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교포’인 제시가 만들어낸 틈으로 더 많은 이들이 넘어온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제시 또한 ‘교포’라는 조건부 이해 대신 그냥 그 자신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도 올 것이다. 마치 〈식스센스〉에서 제시가 만들어낸 균열을 틈타 전소민과 미주가 여성 연예인이 구사할 수 있는 농담의 폭을 크게 확장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