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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28일 12시 29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3월 29일 14시 12분 KST

알파고 이후의 바둑

카스파로프가 딥블루에 패한 이후에 체스의 인기가 떨어질 것으로 걱정했지만, 막상 더 많은 사람들이 대회를 관전하러 오고, 또 온라인에서도 전에 없던 규모로 토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관전하는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 챔피언에 대해서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는데, 이제는 그들이 실수하는 장면에서 '나만 떡수를 두는 게 아니구나'하는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 챔피언들의 사소한 실수를 전에는 모르고 넘어갔으나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돌아가는 체스 프로그램이 분명하게 판단해주니까.

ASSOCIATED PRESS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과 바둑계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서양의 역사가 예수 이전(BC: Before Christ)과 이후(AD: Anno Domini)로 구분되듯이, 바둑의 역사도 Before Computer와 After Deepmind로 구분될지도...... 1963년생인 카스파로프는 1996년에 Deep Blue의 전신 Deep Thought를 상대했고, 1983년생인 이세돌9단은 2016년에 알파고를 상대했다. 이 글에서는 20년 전에 이 같은 변화를 겪었던 체스계를 살펴봄으로써, 이 글이 앞으로 바둑인들이 할 일을 논의하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IBM의 체스 컴퓨터 딥블루는 당시 세계에서 259번째로 빠른 슈퍼 컴퓨터였다. 259번째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이런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www.top500.org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 컴퓨터부터 500번째로 빠른 슈퍼 컴퓨터까지 순위를 매긴다.

컴퓨터 하드웨어의 발전 속도는 놀랍도록 빠르다. 위 표는 조사 시점 별로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 컴퓨터의 연산 속도를 파란색으로, 세계에서 500번째로 빠른, 즉 리스트에 턱걸이한 슈퍼 컴퓨터의 연산 속도를 빨간색으로 나타난 것이다. 초록색은 1등부터 500등까지 500대의 슈퍼 컴퓨터를 동시에 사용할 때의 연산 속도다. 초록색 커브가 exa, 즉 10의 18승과 만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그래서 exascale computing 시대에 살고 있다는 얘기가 종종 나온다. 놀라운 것은 세로 축이 log scale인데도 모든 커브들이 직선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Log scale에서 직선이라면 linear scale로 바꾸면 exponential 커브가 된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빨랐던 슈퍼 컴퓨터는 7년쯤 지나면 top 500 리스트에서 탈락할 지경이 되고, 그로부터 다시 9년쯤 지나면 우리가 들고 다니는 laptop이 그 정도의 성능을 낸다!

1997년의 슈퍼 컴퓨터 딥블루보다 오늘날 스마트폰의 연산 속도가 더 빠르다 (물론, 체스 문제를 푸는 데는 부동소수점 연산 속도가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20만원 남짓 하는 GPU의 연산 속도는 여기에 0이 두 개 더 붙고, 알파고(distributed 혹은 클라우드 버전)는 이런 걸 수백 개 갖고 있다 (슈퍼 컴퓨터 랭킹으로 따지면 400위 정도는 할 것 같다).

구글에 따르면 알파고의 클라우드 버전과 '싱글 머신' 버전이 대국하면 승률이 70% 대 30% 정도라고 한다. 배태일 박사의 랭킹 시스템에 따르면, 승률 기대치가 70%가 되려면 랭킹 포인트로 294점 차이가 나야 한다. 알파고의 클라우드 버전이 이세돌 9단(9,784점; 2016년 3월 기준)과 동급이라면, 알파고의 싱글 머신 버전의 랭킹 포인트는 이보다 294점 아래인 9,490점 근처가 된다. 즉, 한국랭킹 12~13위에 해당한다.

물론 구글이 '싱글 머신'이라고 표현한 것도 CPU 48개, GPU 8개를 장착했으므로 일반 데스크탑 수준은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500번째로 빠른 슈퍼 컴퓨터도 9년쯤 지나면 laptop 수준이 되는데, 알파고 '싱글 머신' 버전이 스마트폰에서 돌아가기까지는 10년도 안 걸릴 것이다.

'Deus Ex Machina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연극이나 문학에서 많이 쓰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좋은 작품은 인과 관계에 의해서 필연적인 결말로 이어지는데, 그렇지 못한 작품에서는 이야기만 잔뜩 벌여놓고 수습이 안되니 (연극 무대의)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과 같은 존재가 억지로 교통 정리 해주는 것을 말한다. 막장 드라마에서 등장 인물들이 갑자기 교통 사고를 당하거나 불치병에 걸려서 죽는 것처럼. 그런데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기계(인공지능)가 너무 발달해 거의 신의 경지에 드는 것을 뜻한다. 매트릭스 3부작의 최종편, 에서 매트릭스를 통제하는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기계를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불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아래의 논문은 2009년에 출판됐다. 여기에 따르면,

"체스에서 이제는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창조적(creative)이다."

"창조적인 체스 플레이란 일반적인 진행(conventional move)에서 벗어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느냐의 문제다."

"인간 플레이어들은 형세를 판단하는데 대개 어느 정도의 편견을 갖고 있다."

"지난 10년 간 인간이 (체스) 컴퓨터랑 맞서는데 유일하게 성공적이었던 방법은, 컴퓨터의 창의력을 제한하기 위해 단순한 길로 이끄는 것이었다." 등등

체스에서는 '창의력'이라는 것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체스 컴퓨터의 머신 러닝 단계에서도 더 이상 인간의 기보는 (볼 가치가 없어서) 학습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둑이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카스파로프가 딥블루에 패한 이후에 체스의 인기가 떨어질 것으로 걱정했지만, 막상 더 많은 사람들이 대회를 관전하러 오고, 또 온라인에서도 전에 없던 규모로 토론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관전하는 양상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인간 챔피언에 대해서 절대적인 존경을 보냈는데, 이제는 그들이 실수하는 장면에서 '나만 떡수를 두는 게 아니구나'하는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 챔피언들의 사소한 실수를 전에는 모르고 넘어갔으나 이제는 스마트폰에서 돌아가는 체스 프로그램이 분명하게 판단해주니까.

그 다음으로는 '바둑의 민주화'를 얘기해야겠다. 바둑에서 초일류 기사가 되려면 한/중/일에서 태어나든지 아니면 어려서 유학을 와야 한다. 여기에 도장 시스템이 있고, 여기서 입단을 해야 초일류 기사들에게 실전으로 배울 기회가 있으니까. 그런데 알파고의 데스크탑 버전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출신 국가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2000년과 2015년의 랭킹 top 20 체스 플레이어들의 출신 국가를 비교해봤다. 딥블루 이후의 랭킹은 그냥 랭킹이 아니고 랭킹 앞에 'classical'이 붙는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의 실력이 더 높기 때문에 사람만 따로 랭킹을 매기는 거다. 2000년에는 20명 중 랭킹 1위 카스파로프를 포함해서 러시아 국적이 7명,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있다가 90년대 초 독립한 나라들까지 포함하면 10명(50%)이 구 소비에트 연방 출신이다. 그런데 2015년이 되면 랭킹 1위 Magnus Carlsen(노르웨이)의 경우를 포함해 굉장히 출신지가 다변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016년 랭킹을 보면 중국 기사가 20위 안에 서너 명 포함돼있다.

'바둑의 민주화'는 이제 시간 문제인데,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15년 뒤에도 우리가 세계 바둑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 열악한 상황에서도 지금껏 세계 보급에 헌신했던 여러 프로/아마 사범님들이 그 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이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해야겠고, 그리고 그 전에 반드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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