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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의 섬찟한 능력

생각해보라. 당신이 폐쇄회로TV(CCTV)가 설치된 합신센터 1인실에 135일간 '보호조치' 된다고. 한 가지 질문만 가지고 일주일 내내 조사받는다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조사를 받은 뒤 저녁엔 '숙제'라고 불리는 진술서를 쓴다고. 홍씨가 볼펜으로 눌러쓴 숙제는 100여 건에 1250여 쪽이었다.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썼던 이야기를 계속 쓰게 하는 건 사실상 고문"이라고 지적한다.

  • 권석천
  • 입력 2016.03.09 05:33
  • 수정 2017.03.10 14:12
ⓒ한겨레신문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틀림없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신이 만약 '테러 위험 인물'이란 중상모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거나 감청당한다면....

국가정보원은 우려를 일축한다.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이나 민간인 사찰은 불가능하며 일반 국민들은 사생활 침해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4일 '테러방지법 제정 관련 입장') 그래도 내가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국정원의 과거 때문이다. 아직도 박정희-전두환 시대 얘기냐고? 아니다. 박근혜 시대다.

지난달 서울고법은 '북한 보위사령부 직파 간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탈북자 홍강철(43)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홍씨가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와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사의 성격도 갖고 있는 합신센터 조사가 변호인 조력 없이,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은 채 진행됐고 ▶검찰 조사에서도 진술거부권 보장을 위해 고지해야 할 내용 중 일부가 빠졌다는 것이었다. 놀라운 건 이 '절차상 하자' 밑에 어두컴컴한 지하 동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폐쇄회로TV(CCTV)가 설치된 합신센터 1인실에 135일간 '보호조치' 된다고. 한 가지 질문만 가지고 일주일 내내 조사받는다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조사를 받은 뒤 저녁엔 '숙제'라고 불리는 진술서를 쓴다고. 홍씨가 볼펜으로 눌러쓴 숙제는 100여 건에 1250여 쪽이었다.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밀폐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썼던 이야기를 계속 쓰게 하는 건 사실상 고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홍씨는 왜 자신의 진술서를 법정에서 부인한 것일까. 검찰이 법원에 낸 녹취서엔 기소 직후 검사와 홍씨의 대화가 나온다.

검사 : 합신센터에서 어쨌든 뭐 수사와 관련돼서 뭐 그런 걸로 회유하거나 그런 거는 아닌데, 조사 다 끝나고 나서 그냥 뭐 이렇게 "어머님을 북쪽에서 데려 오겠다." 그런 약속을 해주신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

홍강철 : 데려오겠다고 하면 도와주시겠다.

검사 : 아니, 그러니까 홍강철씨가 나중에 어머니를 데려오면....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정원의 2회, 6회 피의자신문조서를 보면 문·답은 물론이고 단어 띄어쓰기, 어법에 맞지 않는 붙여쓰기까지 판박이다. Ctrl C(복사), Ctrl V(붙여넣기)를 한 것이다. 대공수사 10년 베테랑의 작품이었다.

검찰은 수사 지휘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던 것 같다. 1심 재판에서 변호인이 "자필 진술서 중 일부(350쪽 가량)만 제출돼 진술의 변화 과정을 알 수 없다"며 전체 진술서 제출을 요구한다. 검찰엔 제출했느냐는 물음에 국정원 조사관은 답한다. "검찰에 그것을 저희가 왜 제출을 합니까." '합신센터 입소 후 작성된 진술서 등을 피고인 측이 열람·등사하게 하라'는 법원 결정에도 검찰과 국정원은 응하지 않는다.

국정원 조사를 요약하면 세 가지다. ①인권에 대한 기본적 감수성도 없고, 절차도 지키지 않는다. ②의욕은 과잉인데 실력은 낙후돼 있다. 오로지 입(자백)에만 매달린다. ③법원 명령까지 듣지 않는,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다.

테러방지법은 '테러 위험 인물로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사람'도 조사·추적하도록 하고 있다. 홍씨 역시 제보가 접수되는 등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법 절차에 따라 조사하면 될 일이었고, 조사 과정에 하자가 있다면 검찰 어딘가에선 제동이 걸렸어야 했다. 검찰 단계에서 검사가 "변호사 입회하에 조사받으시거나..."라고 하자 홍씨는 "그냥 갑시다"라고 말한다.

"아, 이젠 뭐, (고개를 저으며) 지루합니다. 이제는, 아...."(판결문 중)

사람 진을 빼서 무시무시한 간첩 혐의마저 '지루하게' 만드는 국정원의 능력이 테러와의 전쟁에도 이어지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섬찟하고 무섭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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