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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 카미시라타키 역에서

역은 눈에 덮여 있어 더욱 작고 단촐하게 보였습니다. 플랫폼엔 그 흔한 안전바도, 눈비를 피하게 하는 지붕도 없으니 더욱 더. 주변엔 그렇다 할 집도, 마을도 보이지 않으니 이제까지 없어지지 않고 열차가 섰던 것만으로도 놀라운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두번이지만 한 학생을 위해 정차를 했다는 것이, 그리고 졸업을 할 때까지 적자를 보존하면서도 운영을 했다는 것이 이곳에 와서야 새삼 더욱 놀랄 일이었습니다.

  • 윤승철
  • 입력 2016.02.25 08:23
  • 수정 2017.02.25 14:12
ⓒ윤승철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삿포로행 비행기표를 샀습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히는 곳에 가면, 사방이 하얀 곳으로 가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길 것 같아서요. 정말 하루종일 내리는 눈을 보면 차분해 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미 쌓여있는 눈 위로 소리없이 조용히 떨어지는 눈발들을 본다면 저절로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작은 마을에서 눈을 보고 돌아오려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한 일본인 친구가 카미시라타키 역을 추천해줬습니다. 이곳으로 가는 기차는 조용할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들을 볼 수 있는것이라고요. 곧 사라지는 작은 간이역인데요, 승객이 한 명밖에 없는 역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한 명의 승객은 고등학생인데 곧 졸업을 해버려서 거기에 맞춰 역도 폐쇄가 된다고 했습니다. 기차도 학생의 등하교 시간에 맞춰 하루에 딱 두번만 섰던 역이었습니다. 오전 7시 4분에 한 번, 오후 5시 8분에 한 번. 그러니까 운영비도 안 나오는 적자지만 이 친구가 졸업하길 기다렸다가 역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그 역에 가기로 했습니다. 곧 사라지는 역이라니 그 사실만으로도 가고싶은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카미시라타키라는 역도, 그 역에서 혼자 기차를 기다렸을 친구도, 그이만을 위해 출근했을 역무원도 만나보고 싶었으니까요.

위치를 보니 삿포로와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사히카와라는 곳에서 한번 갈아타서 간다면 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열차의 뒷칸에 앉아 뒤로 난 창을 보며 섰습니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자고 있던 보슬눈들이 피어나 허공에서 부풀기 시작하더니 눈발들이 이리저리 날리며 기차 뒷편의 배경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플랫폼에서 먼저 출발한 기차가 눈발 속으로 사라지면 완전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진짜 그런가봅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가는데 열차의 뒷 풍경이 하얗게 무너지니 제가 지나온 세계는 모두 무너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눈덮힌 산과 드문드문 나타나는 작은 마을, 저렇게도 살아가는 나무를 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눈에 덮혀 잠시 잊혀졌다 봄이 오면 드러날 조각상과 한 초등학교의 운동장, 작은 창고들을 지나는 시간에도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눈이 녹기 전에 새로운 눈으로 덮이고, 밤새 언 얼음 위로 또 새로운 눈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카미시라타키에 도착한 날은 주말이었습니다. 매일 혼자 이 역에서 열차를 기다렸을 고등학생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의 얼마 남지 않는 등굣길을 방해하는 것만 같아 그 전 역인 카미카와역에서 하루를 머문 뒤였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 폐쇄하지 않았다는 역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많은 기자들과 사진작가들이 이곳에 간다고 했습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수선하게 등교를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영화에서처럼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주인공이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처럼 상상이 주는 여운이 더 진할 것 같았습니다.

이정표 하나 없는, 역 앞에 흔한 자판기조차 하나 없는 작은 역이어서 놀랐습니다. 허름한 역사 안도 시간표 하나와 만화책 몇 권이 전부였습니다. 역은 눈에 덮여 있어 더욱 작고 단촐하게 보였습니다. 플랫폼엔 그 흔한 안전바도, 눈비를 피하게 하는 지붕도 없으니 더욱 더. 주변엔 이렇다 할 집도, 마을도 보이지 않으니 이제까지 없어지지 않고 열차가 섰던 것만으로도 놀라운 곳이었습니다. 하루에 두번이지만 한 학생을 위해 정차를 했다는 것이, 그리고 졸업을 할 때까지 적자를 보존하면서도 운영을 했다는 것이 이곳에 와서야 새삼 더욱 놀랄 일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 얼마 전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남기기 시작한 방명록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마지막남은 성냥공장을 갔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은 서서히 낡고 녹스는 듯 공장은 금이간 외벽과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성냥이 되길 기다리는 포플러나무들이 한 켠에 쌓여 있고, 만들어진 성냥들은 통에 담기지 못하고 제멋대로 쌓여있었습니다. 성냥이 피었다 꺼지는 순간처럼 공장이 문을 닫는다는 것,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만 잊혀져도 영원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 우리는 사실 이마져도 익숙해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너무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긴 합니다. 누군가의 죽음도, 자주가던 동네 빵집도, 항상 가던 카페도. 이곳으로 오는 기차의 뒤편 유리밖의 풍경도 너무 빨리 사라져버렸고요, 좋던 좋지 않았던 수많은 기억들도, 지금 이 순간도 지나가버렸습니다. 심지어 아무런 신호 없이 갑작스레 오는 경우도 있으니 실은 짧게 이 순간이 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카미시라타키역과 성냥공장은 완전한 끝이 오기 전에 그런 시간을 준 것입니다.

왠지 저 어디 즈음에서 그 학생도 열차를 기다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수동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나니 그는 사라진 뒤였습니다. 주말이라 없는 것이겠지만 혹은 잠시 자리를 비웠겠지만 분명 역의 문을 열고 닫는 역무원도 있을 것입니다. 레일 위로 쌓여있는 눈을 치울 사람이라도요. 이곳에 와서 보니 중요한것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인것 같습니다. 세상은 돈에 의해서도, 어떤 하나의 논리에 의해서도, 누구 한 사람의 결정만으로도 돌아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따뜻한 시선과 관심, 마음이 주는 감동과 감당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의 배려들이 모여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슬프지만요, 때론 이렇게 더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주기도 하나 봅니다. 이제 막 카미시라타키에서 오타루라는 큰 마을로 왔습니다. 마침 해도 떠서 키보다 높게 쌓였던 눈들이 녹기 시작했습니다. 오타루의 눈이 다 녹으면, 눈이 모두 사라지면 왠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할 이야기들이 또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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