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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유가 뚝뚝 떨어져도 휘발유 가격은 뚝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 허완
  • 입력 2015.12.09 11:39
  • 수정 2015.12.09 11:49
ⓒGettyimagesbank

국제유가가 최저치로 떨어졌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6년 10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만큼 많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그러자 언론들은 거의 반자동적으로 '국제유가가 뚝뚝 떨어지는데 국내 휘발유 가격은 요지부동!'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6개월간 국제유가가 40% 가까이 하락했지만 한국의 휘발유 가격은 8%밖에 내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기름 값 하락폭은 다른 나라보다 작았다. 특히, 휘발유 소비자가격이 22%나 떨어진 미국과는 차이가 크다.

9일 블룸버그 집계자료에 따르면 국제유가의 벤치마크로 꼽히는 브렌트유와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가격(4일 기준)은 6개월만에 각각 36.5%와 37.3% 떨어졌다. 이후 8일까지 가격이 더 내려간 것을 포함하면 하락폭은 약 40%로 더 커진다.

그러나 한국의 휘발유 소매가격은 지난 4일 현재 1ℓ당 1천457원으로 6개월 전(6월 12일)의 1천577원보다 120원(7.6%) 낮아지는데 머물렀다. (연합뉴스 12월9일)

‘저유가의 저주’에 국내 산업계가 휘청거리고 있지만 석유제품 판매가가 떨어지는 반사 이익마저 국내 소비자는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6개월 새 국제유가가 30% 넘게 폭락했다. 하지만 국내 기름값은 10%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중략)

석유값이 떨어지면서 정제·유통 마진(이익)이 줄자 정유사와 주유소가 국제유가가 하락하는 속도보다 더디게 국내 판매가를 인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일보 12월9일)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직장인 김동현(39)씨는 최근 국제유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연일 접했다. 차량으로 출퇴근을 하는 김 씨는 주유소 기름값도 좀 내려가겠구나 기대를 했지만 아직 집앞 주유소의 보통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488원이다. 김 씨는 “배럴당 30달러대로 내려갔다는데 국내유가는 언제쯤 내려가는지, 혹시 주유소만 이득을 보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국제유가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합의 불발 이후 연일 하락하면서 김 씨와 같은 궁금증을 가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국제유가가 반토막이 났을 때도 왜 우리 동네 주유소 가격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인지 매번 쌓여온 불만이다. (헤럴드경제 12월9일)

휘발유값이 국제유가 하락 속도 만큼 빠르게 떨어지지 않는 게 과연 비정상적인 상황인 걸까?

국제유가가 떨어질 때마다 매번 나왔던 이야기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현상은 비정상적인 게 아니다. 주유소와 정유업계의 탐욕 때문이라고 꼭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것도 역시 매번 지겨울 정도로 나왔던 얘기다.

국제유가 하락세가 이어지던 지난해 10월 나왔던 이 기사를 보자.

왜 그럴까? 국내 정유사들이 원유를 도입한 뒤 석유제품화되기까지의 시차, 장기도입 계약이 많아서 폭락장이 그대로 반영되지 않는 부분 등 복합적 요인이 여럿 있다. 하지만 연일 미끄럼을 타는 국제유가와 달리 국내 주유소 휘발유 가격의 하락폭이 국제유가에 견줘 미미한 이유는 기름값이 원천적으로 세금에 묶여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달 둘쨋주 현재 정유사의 세후 휘발유 공급가격 내역을 보면, 리터당 평균 1695.03원인데 흔히 ‘유류세’로 불리는 교통·에너지·환경세(교통세), 교육세, 주행세 3종 세트가 745.89원으로 44%를 차지한다. 여기에 부가세까지 포함한 세금은 899.98원으로 정유사 세후 공급가의 53%이고, 정유사 세전 공급가격에 이미 포함돼 있는 원유 도입 당시의 관세 3%와 수입부과금 리터당 16원까지 고려하면 기름값 전체에 붙는 세금은 절반을 훌쩍 넘어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한겨레 2014년 10월20일)

올해 1월에도 비슷한 기사가 나왔다.

국제유가 하락분의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국내 휘발유 소비자가격은 크게 ‘정유사 세전 공급가+정부 세금+주유소 마진’으로 구성된다. 정유사는 원유를 들여와 휘발유를 만든 뒤 비용과 영업이익 등을 더해 세전 공급가를 결정하고 정부는 800~900원대 세금을 부과한다. 그리고 주유소가 비용과 영업이익 등을 고려해 최종 소비자가격을 결정하게 된다.

국내 정유사는 대개 전주의 국제 휘발유가를 기준으로 국내 공급가를 정하는데, 12월 마지막주의 국제 휘발유가는 2014년 하반기 고점 대비 45.1% 떨어졌고 정유사 세전 공급가는 42.6% 떨어졌다. 사실상 큰 격차없이 반영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유사의 세후 공급가로 넘어오면 하락률이 23.1%로 크게 줄어든다. 저유가 체감도가 크게 떨어지는 이유는 휘발유 관련 세금이 800~900원대로 사실상 고정돼 있는 탓이다. (한겨레 1월11일)

문제는 주유소나 정유회사가 아니라 정부라는 지적이 나온다. '유류세'(교통세+교육세+지방세)는 국제유가와는 상관 없이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따르면 2013년에 이 '유류세'로 정부가 걷은 세금은 21조원에 달한다. 2013년 전체 국세수입(201조9000억원)의 10%를 넘는 금액이다.

조선비즈는 "우리나라 기름 값은 결코 싼 편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유류 세금 때문"이라며 "OECD 회원국 중에서 휘발유 가격 대비 세금 비중이 한국보다 높은 나라는 영국과 독일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유류 관련 세금은 미국 보다 5.7배 많고, 캐나다 보다 2.7배 많다. 세금을 붙인 미국의 휘발유 최종 소비자 가격은 리터당 699원, 캐나다는 리터당 895원 수준이다. 미국의 기름 값은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유류 소비자가 정부의 ‘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비즈 12월9일)

정유사들은 “리터당 800∼900원의 고정 유류세는 국제 유가가 하락할 때 소비자들에게 유가 하락의 수혜가 가는 것을 막고, 국제 유가가 상승할 때는 국내 기름값 폭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수입 원유의 세전 가격은 판매 가격(보통 휘발유 기준)의 30% 수준인 447.1원 정도다. 정유사들의 마진은 9%(130.8원)이다.

국제 유가가 40달러선에서 다시 반토막이나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져도, 900원 가까운 세금은 유지된다. 리터당 1100원대가 마지노선이라는 의미다. 리터당 1100원이면, 정유사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많더라도 200원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저유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정부’라는 지적이 많다. (조선비즈 12월7일

물론 무조건 유류세를 낮추는 게 능사는 아닐 수도 있다. 특히 한국은 4개 기업이 전체 주유소의 91.5%(2013년)를 차지하고 있어 '독과점' 구조에 가깝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유류세를 낮춰도 휘발유값 등락에는 별 영향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또 유류세는 환경오염과 교통혼잡에 대한 일종의 '부담금' 성격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수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유류세 인하가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무조건 유류세를 내려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꼼꼼하게 뜯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분명한 건, 국제유가가 떨어지면 휘발유값도 그만큼 뚝뚝 떨어지는 그런 상황은 구조적으로 벌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석유 뿐만 아니라 다른 소비재 품목의 가격도 마찬가지다. 국제 밀 거래가격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해서 동네 식당의 칼국수 가격이 똑같이 오르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또 커피 원두가격이 아무리 떨어져도, 커피 가격에서 원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한줄요약 : '원가가 이만큼이나 떨어졌는데 소비자가격은 그대로라니!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기사들에 분노하지 말자. 대개의 경우, 완벽히 틀린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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