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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논쟁은 가짜다 | 아이유 사태를 둘러싼 표현의 자유, 검열, 예술의 문제

아이유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은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짜 논쟁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예술은 예술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야 하며, 그것이 결국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히스테리 환자 대하듯 한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하여 시민의 비판을 멸시하는 이들이야말로 예술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비판이 아니라 검열이다.

  • 김현호
  • 입력 2015.11.12 07:16
  • 수정 2016.11.12 14:12
ⓒ로엔트리

표현의 자유와 검열 반대를 말하는 것은, 잔혹하고 무감각한 예술에게 숨을 장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가혹한 공론장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끝까지 비판당하고 두들겨맞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권력은 우리를 위해 그런 예술을 어딘가로 끌고 가서 묻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시민의 판단을 국가에 위탁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눈을 빼어버리고 국가의 눈을 통해서 예술을 판단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열에 맞서 싸워야 한다.

문제는 검열에 맞서다 보면 정작 비겁한 예술을 공격할 겨를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오히려 만약 검열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그 예술을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예술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이나 비평은 권력에 의해 포획당해 결국 검열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검열은 오히려 폭력적인 예술을 공격함으로써 그것을 비평의 칼날로부터 보호한다. 약자를 조롱하고 자신의 예술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던 터프가이들이 언론자유의 투사이자 피해자의 자리에서 안온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다. 나는 비평가로서 가혹하게 비판해야만 하는 몇 개의 작업들에 대한 발언을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 말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유통되고 사용될 것인가 하는 걸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장집의 말처럼, 시민사회의 논쟁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영역의 문제들이 사법의 영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이유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은 예술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짜 논쟁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예술은 예술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야 하며, 그것이 결국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 가사와 뮤직비디오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들을 히스테리 환자 대하듯 한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예술에 대한 신뢰가 어떤 역사적, 비평적 근거에 기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이런 말은 미디어와 결합된 낡은 낭만주의 예술가 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최소한 그런 세상은 한 번도 온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선을 넘는 예술은 언제나 비판받았고, 앞으로도 비판받을 것이다. 그들이 주워섬기는 외국의 예술들도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다.

그렇다면 예술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은 나쁜 것인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작업이 예술이라는 칭호를 얻는 순간, 그것의 윤리적 책무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폭력이나 추행, 살인을 다루는 것들 중에도 진짜 예술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면죄부가 아니다. 예술 작품 속에 있다 하더라도 살인이나 강간은 여전히 가증스러운 일이다. 단지 어떤 좋은 예술들은 그런 비윤리적인 소재와 뒤엉켜 싸우면서 심연 속으로 끝없이 내려간다. 그들 중 선정적인 소재에 잡아먹히지도 않고, 동굴 안으로 피신해서 도덕적인 훈계를 늘어놓지도 않는 몇몇 생존자들에게는 위대한 예술이 될 가능성이 주어진다.

밀려오는 비판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나는 예술이니까 이해해 달라고 징징대는 이들의 어리광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들의 예술로 인해 사회가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예술은 사회에 기생하며 그것과 불화하는 것이지, 사회를 살찌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시민사회가 단련되는 것은 예술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썬 비판과 반론에 의해서다. 예술이 시민사회의 비판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고, 비평과 저널리즘이 예술가와 시민사회 양쪽의 주장을 섬세하게 정리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때 비로소 예술의 공간은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나와 사회적으로 확장되며, 예술 역시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예술과 예술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인식하는 것, 결국 사회에 숨막히게 결박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예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라고 자신을 기만하는 것보다는 성숙한 태도인 듯하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예술을 비판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비판에 있어서의 자격 논리, 즉 예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식의 조롱은 몰지각하다. 이런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원자력발전소 같은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조롱하는 이들은 사회적 대화와 논쟁을 통해 그것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의제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들이 다른 이의 고통을 환상통이나 히스테리라고 몰아가는 것 역시 무지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환상통은 없다. 오직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는 분명 고통과 슬픔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고통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낄낄댈 정도로 무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비평가 이영준은 예술은 살을 베어서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라고 썼다. 좋은 예술은 단단한 각질을 베고 조직을 파헤쳐 아프고 민감한 살로 세상을 만나게 한다. 무조건 타인의 고통을 건드리는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다루거나 정면으로 뚫고나가는 것들 중에도 좋은 예술이 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예민함을 잃는다면 예술은 폭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술을 공론장에 끌어올려 비판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적절한 비판의 방식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불쾌한 예술을 수거해서 폐기해 달라고 청원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의 비판은 검열의 형식을 닮아가지도, 권력의 개입을 요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권력에 의해 꼴사나운 것이 시원하게 사라지는 경험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예술을 구성하는 디테일들을 도상학적으로 분석해서 결론을 내리려고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아이유의 가사의 어떤 부분이 소아성애를 상징한다고 하는 식의 주장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작업물의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반론이 가능하지 않다. 이런 식의 비판을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적절한 예술을 비판할 때 위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이것들이 가장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강력함이 지닌 위험성과 쾌감 때문에 우리는 그 방법들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세계관, 그 작업이 사회에 놓이는 위치와 파생하는 의미 같은 것에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은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끝까지 버티며 예술을 공격하고, 예술의 반격을 견뎌내야 한다. 답 없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시민사회의 중요한 영토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하여 시민의 비판을 멸시하는 이들이야말로 예술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이다. 그들의 보호를 받았던 예술을 보는 것은 엄마 품을 맴도는 나이든 성인을 보는 것처럼 괴롭다. 우리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비판이 아니라 검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열을 닮아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비판과 토론을 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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