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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2일 10시 3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22일 14시 12분 KST

책 한 권으로 역사를 바꿀 수 없는 이유

학자들이 케냐의 역사에 대해 쓴 유명한 책들이 많지만,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만큼 진심을 담은 역사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비록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수많은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은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손주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책에서도 찾기 힘든 식민지 시대와 독립 후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케냐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고, 또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역사는 책 한 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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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에 있을 때, 어떤 땅의 역사를 들어보려고 할머니 한 분을 만나 뵈었다. 할머니의 손녀가 할머니에게 들었다면서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책으로 읽던 케냐의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해서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 할머니의 집을 물어서 찾아갔다.

그렇게 찾아가서 들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영국인들이 케냐에 들어왔을 때, 그저 땅이란 땅은 몽땅 그들의 차지였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저기 보이지 않는 곳까지 한 사람의 영국인이 주인이던 시절이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그이의 이름을 독립 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다). 그런 현실이 답답해서 독립을 위한 운동을 준비하고 지원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할머니의 남편도 그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스무 살 때, 남편은 독립운동 혐의(영국 식민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남편은 없는데 처음으로 배 아파 낳은 아기가 너무 아파서, 품에 안고 걷고 또 걸어 영국인들이 세운 병원에 갔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돈이 없었다. 3실링이 없어서, 그 동전 세 개가 없어서 아기는 치료를 받지 못했고, 할머니가 돈을 구하러 간 사이에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렇게 죽은 아이를 묻을 땅 한 뼘이 없는 할머니에게 남편을 고용했던 한 영국인이 땅을 내어주어 겨우 장례를 지냈다. 그런데 남편에 이어 할머니를 의심하던 정부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할머니에게 아이를 죽여 묻은 것이 아니냐며 아이의 시신을 파내라고 하더란다. 할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다시 파냈고, 그 아이의 시신을 붙잡고 서럽게 서럽게 울었단다. 우는 할머니를 보고 그이들은 그냥 돌아가더란다.

세월이 흘러 1963년 케냐는 독립을 했고, 또 수십 년이 흘러, 할머니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그제서야 어떤 젊은 영국인들이 와서 보상을 해준다며 가혹했던 시절에 대한 증언을 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냐고 내가 물으니, 할머니는 "I forgive them (그들은 용서한다)" 하고 돌아가라고 하셨단다. 어차피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watoto(아이들)"가 아니냐고 하신다. 그들의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신다 (식민지 시대 영국인들의 후손들이라는 표현).

그날, 할머니께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는데,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께서 싸주신 아보카도와 망고 그리고 옥수수가 담긴 봉지를 들고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는데, 노랗게 익은 망고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창밖에는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찾아갔던 그 병원의 버려진 건물이 보였고, 한 사람의 영국인이 독차지했다는 그 땅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땅을 되찾으려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땅, 케냐에서는 아직도 땅이 없어서 내쫓기는 사람들이 많다. 독립 후에 있었던 내부 정치적 분쟁과 기득권을 가진 집단 위주로 이루어진 토지분배 등이 남긴 결과이다. 어디서 들어본 듯도 싶은 '친숙한' 역사다.

학자들이 케냐의 역사에 대해 쓴 유명한 책들이 많지만,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만큼 진심을 담은 역사를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비록 많은 것을 빼앗겼지만 수많은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은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손주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책에서도 찾기 힘든 식민지 시대와 독립 후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케냐 곳곳에서 울리고 있는 중이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대기근을 겪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철거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도시의 거대 빈민가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거쳐온 역사를 간직하고 또 전하고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고, 또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역사는 책 한 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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