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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외환위기가 몰려온다

ⓒgettyimageskorea

신흥국들의 통화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신흥시장에서의 자본 이탈도 가속화하고 있다. 1997년에 발발한 아시아 외환위기 같은 신흥국 통화위기에 대한 우려가 먹구름처럼 일고 있다.

지난해 중반부터 시작된 신흥국의 통화가치 하락은 최근 중국 위안의 평가절하를 계기로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말레이시아 링깃 등 신흥국 통화들은 아시아 외환위기가 절정이던 1998년이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수준에도 가치가 못미치는 실정이다.

■ 통화가치 폭락과 자본 이탈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진원지 국가들은 올해 들어 당시 위기 직전의 상황을 방불케 하는 통화가치 하락을 겪고 있다. 19일 현재 미국 달러와 대비해 말레이시아 링깃이 14.37% 하락한 것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루피아 10.48%, 타이 밧 7.51%, 한국 원 7.23% 등이 가치 하락을 겪었다.

이번 신흥국 통화위기는 아시아 주요 신흥국보다는 다른 지역의 신흥국에서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인다. 브라질 헤알은 올해 들어 달러 대비 25%나 떨어져, <로이터>가 추적한 152개국 통화 가운데 키르기스스탄·우크라이나·아제르바이잔에 이어 4번째로 크게 가치가 떨어졌다.

터키 리라는 올해 들어 24.3%, 콜롬비아 페소는 21%, 칠레 페소는 11.5%, 남아공 랜드는 10.5%나 가치가 떨어졌다. 이 가운데 브라질 헤알은 지난 1년 동안 약 34%, 터키 리라는 32.5%,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25%, 남아공 랜드는 23%나 떨어졌다.

<블룸버그뉴스>는 모건스탠리의 분석을 인용해 지난해부터 가치 하락이 본격화한 신흥국 통화 가운데 ‘5대 취약 통화’를 선정했다가, 최근 중국 위안 평가절하 이후에는 이를 ‘10대 불안 통화’로 확장했다. 5대 취약 통화는 브라질 헤알, 터키 리라, 인도네시아 루피아, 남아공 랜드, 인도 루피였다.

위안 평가절하 이후의 10대 불안 통화는 헤알, 콜롬비아 페소, 칠레 페소, 남아공 랜드, 페루 솔, 한국 원, 타이 밧, 러시아 루블, 싱가포르 달러, 대만 달러다.

아시아 외환위기에서도 비켜났었던 싱가포르 달러도 올해 들어서는 5.43% 가치가 떨어졌다. 신흥국 대열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싱가포르의 달러마저 신흥국 통화위기의 여파에 흔들리는 현실은 이번 통화위기의 심각성을 반영한다. <블룸버그 뉴스>는 신흥국 통화가 2000년 이후 주간 단위 집계로 가장 긴 매도세를 이어가고 있다며 ‘금세기의 최장기 신흥국 통화 매도’ 사태라고 규정했다.

신흥국으로부터의 자본 유출은 통화위기를 가속화하면서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신흥국 통화위기가 본격화된 지난해 6월부터 13개월 동안 신흥국 시장을 빠져나간 자금 규모는 1조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18일 보도했다. 투자은행인 ‘엔엔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의 공식 자료 집계와 평가에 따르면, 지난 7월말까지 13개월 동안 19대 신흥국 시장에서 빠져나간 순자본유출은 9420억달러에 이른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절정이던 2008~2009년 사이 3분기 동안의 4800억달러의 거의 두 배다.

이는 2009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6년 동안 19대 신흥국에 들어온 약 2조달러의 순자본유입 흐름이 급격히 반전된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양적완화 등 돈풀기 정책으로 선진국들에서 나와 신흥국들로 흘러들어간 돈들이 급격히 이탈하면서 신흥국 통화위기가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신흥국 통화들의 가치는 6년 반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보도했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가치가 폭락한 때로 되돌아간 것이다. 주요 신흥국들의 통화가치를 반영하는 제이피모건의 신흥시장 통화지수는 2000년에 지수가 만들어진 이후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다.

■ 신흥국 위기의 배경

통화가치 하락으로 상징되는 신흥국 위기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결과다. 한마디로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의 정착 때문이다. 여기에다 미국의 금리인상 임박, 중국 위안 평가절하 등의 기술적 요인들이 겹치며 위기는 심화되고 있다.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는 그동안 고도성장을 누려온 신흥국 경제에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신흥국 경제의 저성장은 세계 교역의 침체, 원자재 가격 하락, 저금리 기조 정착이라는 장기 요인으로 굳어지고 있다고 <비비시>는 분석했다.

첫째, 세계 무역 성장률은 2015년까지 지난 4년 동안 연속으로 세계 경제 성장률에도 못미쳤다. 수출에 의존해온 신흥국 경제에 주름이 잡히고, 통화가치 하락으로 귀결되고 있다.

둘째, 저성장은 원자재 가격의 장기적 하락을 이끌어, 신흥국 가운데 자원 생산국들의 경제가 급격히 수축되고 있다. 대표적인 자원인 석유는 지난해 여름 배럴당 110달러에서 현재 40달러로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30달러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산업생산의 지표인 구리의 가격은 6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자원 수출국인 브라질 헤알, 남아공 랜드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셋째, 저금리 기조 정착으로 금융조건이 악화되어 성장 추동력이 상실되고 있다. 지난 35년 동안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의 장기금리는 꾸준히 하락하여 왔다. ‘채권왕’ 빌 그로스에 따르면, 1981년 미국의 장기금리는 14.5%였으나, 현재는 2.2%다. 금리가 꾸준히 하락하면서 미국의 대표 증시지표인 다우지수는 900에서 1만7500으로까지 올랐다.

금리 하락은 금융비용 하락을 의미해, 이 기간 동안 싸지고 넘쳐나는 돈은 성장을 추동해왔다. 그러나 이제 금리인하는 한계에 도달하면서, 지난 35년간의 금융분야 등에서의 활황은 재현 불가능한 상태다.

중국 경제의 성장과 둔화는 이런 요인들을 반영하는 집합체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면서 중국에서 만들어진 값싼 공산품은 미국 등 서방에서 그 전까지 숙제였던 인플레이션을,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중국의 수출 경제 역시 이런 구조에서 고도성장 가도를 질주하며 중국과 서방 등 세계 모두에게 윈윈게임이 됐다. 세계 무역이 팽창하고, 중국의 수요 등으로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나머지 신흥국들도 성장을 구가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잔치는 끝나고, 그 파장은 신흥국에서 더 깊고 넓게 퍼지고 있다. 주요 신흥국 증시를 반영하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신흥시장지수 편입 기업들은 역사상 가장 긴 침체기를 겪고 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11년 시작된 기업실적 침체는 이달까지 꼬박 4년간 이어졌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도 실적 침체기는 2년에 불과했다. 신흥시장 주요 기업들의 주당순이익(EPS)은 2011년 8월 고점에 비해 25% 추락했다.

미국이 금융위기 수습을 위해 양적완화 정책으로 풀어놓은 돈이 일으킬 인플레이션 등을 막으려고 금리인상을 예고하면서 신흥국에서 자금 유출은 가속화되고 있다. 또 중국도 경기 둔화에 따라 1994년 관리변동환율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위안 절하를 큰 폭으로 단행해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을 더욱 가파르게 만들었다.

■ 통화위기의 먹구름?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같은 통화위기로 폭발할까?

전문가들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며 아직 신중한 견해를 내보인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은 ‘핫머니’(단기적 투기자금)가 부추긴 신용거품이 꺼지면서 급격히 외환위기에 빠져들었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기본적으로 지역적 위기였다. 현재는 당시에 견줘 아시아 신흥국들의 외환보유고가 양호하고, 그때와는 달리 핫머니들이 부추긴 신용거품이 아니다. 이번 사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연장이고, 아시아를 넘는 전세계 신흥국이 대상이다. 앞서 언급한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반영하는 사태라고 <비비시>는 해석했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통화위기의 전조와 씨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링깃은 지난 14일 미국 달러당 4.1500까지 떨어져 1998년 9월1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말레이시아는 아시아 외환위기로 링깃 가치가 폭락하자, 98년 9월1일 링깃을 달러당 3.8로 고정하는 고정환율제를 도입하고 자본 유출 등을 제한하는 자본 통제를 실시했다.

그런데 링깃의 가치가 98년 자본 통제 도입을 불렀던 외환위기 때보다도 더 하락한 것이다. 링깃의 가치가 이렇게 하락하자, 말레이시아가 다시 고정환율제와 자본 통제를 도입할 우려가 시장에서 고조되며 자본 유출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블룸버그 뉴스>는 보도했다. 제티 악타르 아지즈 말레이시아중앙은행 총재도 외환보유고가 2010년 이후 처음으로 1000억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며 외환보유고를 더 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페리 와리지요 중앙은행 부총재가 지난 18일 중앙은행은 시장에서 “(루피아를)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구스 마르토와르도조 총재는 루피아 방어를 위해서 은행 창구에서 달러 매입을 통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타이에서는 지난 18일 하루에만 외국인 투자자들이 69억밧(1억9370만달러)의 주식을 매도하고 철수했다. 이는 2014년 12월 이후 하루 매도세로는 최대다. 이는 그날 방콕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폭탄테러로 타이 경제를 이끄는 관광업이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에서였다. 경제 외적인 충격에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돈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25%가량의 통화가치 하락을 겪은 카자흐스탄은 20일 가중되는 통화가치 하락 압력에 굴복해 환율제도를 전격적으로 자유변동환율제로 변경했다. 당국의 환율제도 변경 직후 카자흐스탄의 통화 텡게는 달러 대비 26.2%나 급락한 달러당 255.62로 폭락했다. 카자흐스탄의 환율제도 변경은 사실상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용인하는 조처다.

중국의 위안 평가절하 이후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 압력은 가중되고 있다. 베트남 등 일부 국가는 중국에 맞서는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경쟁적인 통화가치의 평가절하를 단행해 통화전쟁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지난 19일 올해 들어 세번째 평가절하를 했다. 베트남은 자국 통화 동을 달러 대비 0.99% 평가절하하는 한편 환율 변동폭을 하루 2%에서 3%로 늘렸다. 환율 변동폭 확대는 엿새 만에 두번째다. 신흥국의 통화가치 하락 등 자산시장 폭락은 올해 하반기에 미국의 금리인상이 언제 어떻게 결정될지에 따라 다시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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