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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윌리엄스가 남긴 온기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책상에 올라서며 말합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해!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한다고." 물론 지금 어디에 올라서서 어떤 각도로 본다고 해도 로빈 윌리엄스의 빈자리에 대한 슬픔은 매한가지일 거 같습니다. 하지만 문득 그 선명한 빈자리는 그가 남긴 웃음이 우리에게 그만큼 명징하게 와닿는 무엇이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까닭에 되레 꽉 차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우린 그 자리를 문득문득 돌아보고, 기억하며 살아가겠죠.

  • 민용준
  • 입력 2015.08.12 12:31
  • 수정 2016.08.12 14:12
ⓒASSOCIATED PRESS

벌써 1년. 향년 63세, 로빈 윌리엄스가 눈을 감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던 남자였다. 다시 그 미소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마음 한 켠이 쓸쓸해진다. 그의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 남겨진 발자취를 따라 여전히 애도를 빈다.

죽음 앞에서 삶은 필연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물론 모든 죽음이 마냥 덧없고 허무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어떤 죽음은 그 삶이 명료하게 빛나던 순간을 자각하게 만들죠. 지난 해 같은 날 오전에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애도의 물결을 보며 잠시 아릿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자택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나도 아는 그 로빈 윌리엄스 말입니다. 게다가 자살로 추정된다니, 생각이란 것이 잠시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21세기의 로빈 윌리엄스는 조금 흐릿한 사람입니다. 2000년대 이후로도 그가 출연한 작품을 본 적이 있지만 '로빈 윌리엄스가 출연한 작품'으로 기억되는 작품은 드물었던 거 같아요. 특히 90년대의 로빈 윌리엄스를 기억한다면 더더욱 그렇죠. 90년대에 로빈 윌리엄스는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였습니다. 그리고 주로 부드럽고 풍요로운 특유의 미소로서 기억되는 사람이었죠. 개인적으론 그가 여장을 하고 등장했던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에서의 연기를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지만 무능력한 가장이기도 했던 다니엘은 결국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주1회 토요일에만 아이들을 볼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항상 보고 싶었던 다니엘은 아내가 가정부를 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여자로 위장을 해서 가정부가 되어 아이들의 곁에 있길 결심하죠. 다소 황당한 설정이지만 사실적인 특수효과만큼이나 능청스러운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우여곡절 끝에 분장이 벗겨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아이들 앞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이었습니다. 기승전결이 명확한 코미디였지만 그토록 간절한 부성애를 끌어안은 로빈 윌리엄스의 얼굴은 마음을 울리고도 남을 만한 것이었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도 이처럼 그가 남긴 웃음이 위로의 손길로 와닿는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페이소스를 껴안을 수 있는 코미디가 진짜 훌륭한 코미디임을 잘 아는, 진정한 희극배우였습니다.

물론 모두가 잘 알다시피 로빈 윌리엄스가 코미디 배우로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건 아닙니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고 친숙한 인상으로 영화 속에 일관되게 자리했던 까닭에 그의 존재감이 저평가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항상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존재로서 영화 속에서 자리했습니다. 전장에서도(<굿모닝 베트남>(1987)), 교실에서도(<죽은 시인의 사회>(1989), <굿 윌 헌팅>(1987)),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범죄자 앞에서도(<피셔 킹>(1981)),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격려하고, 끌어안으며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로빈 윌리엄스는 항상 누군가를 위로하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모습을 본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는 로빈 윌리엄스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죠. 그런 그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했다니 쓸쓸한 기분이 듭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님이 감동적이었던 건 타인에게 있어서 실패라 치부될 수 있는 삶을 스스로 감당하면서도 그 실패를 어린 세대에게 가치 있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유산처럼 남겨주는 어른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어른으로서 종종 등장했습니다. <토이즈>(1992)나 <쥬만지>(1995)와 같은 작품에서 그는 아이들과 함께 갖은 위기를 건너고 세상을 구합니다. 또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온 몸을 내던지는 아버지이거나 남편이기도 했습니다. <후크>(1991)에선 보기 드물게 나이 든 피터팬을 연기하며 후크 선장으로부터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선 사후에도 자신의 아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건너는 남편으로 등장합니다. 수많은 보도에서도 발표됐지만 로빈 윌리엄스가 남긴 마지막 트위터 포스팅이 자신의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였다고 하죠. 그의 현실에서도 가족이란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그런 가족을 등지고 스스로 먼 길을 떠나는 이의 심정이란 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책상에 올라서며 말합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도 봐야해! 바보 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한다고." 물론 지금 어디에 올라서서 어떤 각도로 본다고 해도 로빈 윌리엄스의 빈자리에 대한 슬픔은 매한가지일 거 같습니다. 하지만 문득 그 선명한 빈자리는 그가 남긴 웃음이 우리에게 그만큼 명징하게 와닿는 무엇이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까닭에 되레 꽉 차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우린 그 자리를 문득문득 돌아보고, 기억하며 살아가겠죠. <죽은 시인의 사회>의 명대사로 꼽히는 월트 휘트먼의 시구는 이렇습니다.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역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That the powerful play goes on, and you may contribute a verse)." 물론 로빈 윌리엄스의 연극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한 편의 시 같군요. 우린 당신이 올라섰던 그 자리에서 당신이 보여줬던 필생의 드라마를 그리워할 겁니다. 오, 캡틴. 굿바이, 캡틴. R.I..P. Robin Wi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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