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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은 정말 '자존감'을 높여주는 걸까?

  • 박수진
  • 입력 2015.06.19 07:58
  • 수정 2015.06.19 07:59
ⓒtvn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는 임금과 두 명의 재단사, 그리고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어느 날 임금에게 두 명의 재단사들이 찾아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어리석은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 옷이 완성되고, 임금의 눈에는 그 옷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려워 옷이 보이는 척 입고 거리 행진을 한다. 신하와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옷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며 박수치고 환호한다.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치기 전까지 말이다.

티브이를 보면서 벌거벗은 임금의 거리 행진 장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메이크오버 프로그램(버릇이나 성형 등 개인을 변화시키는 내용을 담은 장르)을 볼 때 그렇다. 이 프로그램들은 동화 속 재단사처럼 시청자에게, 그리고 프로그램 출연자에게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옷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준다는 옷은 ‘아름다움’이나 ‘예쁨’이 아니다. 그런 옷은 너무 흔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힘들고, 노골적이라서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요즘 이들이 들이미는 신상은 ‘자존감’이라는 옷이다.

두 편의 메이크오버 프로그램이 이번달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시즌5에 접어든 스토리온의 <렛미인5>와 이 프로그램과 비슷한 기획의 제이티비시 <화이트 스완>이다. 메이크오버 프로그램들이 성형수술과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는 논란은 <렛미인>이 등장한 2011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이 프로그램들이 방패처럼 내미는 단어가 바로 자존감이다. 최근 메이크오버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이들 프로그램은 제작진 인터뷰 등을 통해 성형수술만을 강조하는 성형쇼가 아니라 외모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존감을 높이는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존감은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고 긍정하는 마음을 말한다. 매 순간 다른 사람과 비교되고 평가받는 경쟁 사회에서 남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존감은 건강한 삶의 기반이다. 메이크오버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대체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인간관계를 힘들어하고, 외모를 이유로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스스로를 배제시키기도 한다. 이들은 자존감이 매우 낮은 상태로 프로그램의 문을 두드린다.

이들 프로그램이 외모의 변화보다 자존감에 방점을 찍고 출연자의 더 나은 삶을 지원하고 응원한다면 꽤 긍정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존감에 주목해 이들 프로그램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찾아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자존감에 주목해 이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이들 프로그램은 여전히 ‘비극 경연대회’라도 하는 듯 출연자들의 불행을 진열하고 그 불행에 ‘괴물’, ‘프랑켄슈타인’, ‘○○녀’ 같은 꼬리표를 붙여 누가 가장 불행한지 보여준다. 이들의 불행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데 가장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이 바로 자존감이다. 이미 낮은 출연자들의 자존감을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여기에서 출연자의 자존감은 실제 출연자가 느끼는 자존감을 말하는 게 아니라, 티브이에 보여지는 출연자의 자존감을 말한다. 실제 출연자의 자존감이 어떠한지는 이 프로그램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티브이에 얼마나 불행하게 보여지느냐가 중요하다.

스토리온 <렛미인5>의 ‘가려야만 사는 딸’ 편의 한 장면.

출연자의 자존감을 끌어내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노골적인 표현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법이다. 기혼자들이 나올 때는 외모를 비하하는 남편의 폭언 장면이 필수다. 싱글의 경우 가족과의 갈등을 보여준다. 지난 5일 <렛미인5> 첫회에는 돌출된 치아와 탈모가 고민인 여성이 ‘가려야만 사는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등장한다. 가족 인터뷰 장면에서 이 여성의 아버지는 딸의 탈모가 자신의 영향인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차라리 그럴 바엔 태어나지를 말지”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우는 여성의 모습 위로 ‘미안한 마음에 모진 말을 꺼내는 아버지’와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의 깊은 속마음’이라는 자막이 올라간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이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거 낳아서 이렇게 엄마도 힘들고 나도 힘든데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미안하죠, 엄마한테.” 가족 인터뷰 이후에 이 여성이 엑스(X) 염색체 부족으로 발생하는 유전질환인 터너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서로에 대해 미안한 마음에 한 얘기라고 해도, 유전질환이 밝혀지기 전에 나온 얘기라고 해도 이런 내용을 화면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이 여성의 자존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둘째는 외모로 인해 받는 사회적 차별을 그대로, 때로는 과장해서 보여주는 방법이다. <렛미인5>의 ‘가려야만 사는 딸’은 아르바이트 면접 자리에서 “얼굴이 좀 그런 거 같아서”, “이쪽 일 자체가 손님을 마주하는 거고 거부감이 들면 저희 입장에서도 곤란하니까”라는 얘기를 들으며 떨어진다. 지난 8일 방영된 <화이트 스완>에는 비뚤어진 턱이 콤플렉스인 여성이 출연했다. 이 여성 역시 외모 때문에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탈락한다. 제작진은 이 여성이 면접에서 떨어진 다음에 작가에게 면접을 보게 한다. ‘손쉽게 구직 성공’이라는 자막과 함께 작가가 면접에 통과했음을 알린다. 이 여성은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한다. 면접은 모두 몰래카메라로 촬영된다. 뿌옇게 처리된 화면 속에서 서슴없이 외모 차별 발언을 내뱉는 장면과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차가운 현실’ 같은 자막은 꼭 붙어다닌다. 외모로 인한 차별은 ‘어쩔 수 없다’는 제스처다.

폭언과 차별, 이 두 가지는 출연자들을 꽁꽁 묶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항의하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걸 이런 화면을 통해 확인시켜준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으니, 이제 의사들이 구세주처럼 등장해 수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일만 남았다. 여러 차례에 걸친 수술이 시작되고 출연자들은 합숙소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점점 사회성을 되찾아간다. 심리상담이나 정신과 진료를 받기도 한다. 그렇게 회복까지 끝나면 이들은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다. 진행자들은 환호하고,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들의 외모를 칭송한다. 일자리도 구한다. 출연자의 행복한 웃음과 함께 ‘자존감 높이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매번 성공으로 끝난다.

성형수술이 자존감을 높이는 데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예뻐졌으니까, 날씬해졌으니까 이제 나를 사랑해야지” 같은 조건부 존중이나 긍정은 일시적인 처방일 뿐이다.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진짜 방법은 프로그램 안에 있다. 폭언과 차별이다. 외모에 대한 폭언이나 차별이 출연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현실’을 핑계대며 폭언과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과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의 문제라는 것을, 설령 그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해도 정확히 아는 것이 자신에 대한 존중과 긍정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은 자존감을 낮출 때는 악착같이 폭언과 차별을 물고 늘어지더니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슬그머니 눈을 감아버린다. 출연자들의 고민을 ‘외모’라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이 문제를 수술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가장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폭언과 차별을 건드리는 것은 시청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혹시 당신도 차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라는 질문은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뻐졌으니까 이제 행복할 거라고 믿고 마음이 편해져야 그다음 편을 기다리게 된다.

한국여성민우회와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여성환경연대 등 여성단체들의 주장처럼 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짜리 성형 광고’라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존감의 본래 의미를 찌그러뜨린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자존감이라는 말은 꽤 그럴듯하다. 그 말을 가져다 쓰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실제로는 멸시와 무시, 부정의 손을 들어주면서 자막에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쓰고 진행자의 멘트를 통해 그것이 높아진 것처럼 말하는 건, 자존감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아니면 그 뜻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여겨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말장난은 그만하자. 언제까지 벌거벗은 임금의 거리 행진을 지켜봐야 하나.

글=안인용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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