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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한국에 속죄하며 산 일본인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5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매번 모금활동 등을 통해 마련한 돈을 빈민운동에 기부했습니다. 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도쿄의 자택을 파는 등 사재를 몽땅 털어넣었고, 일본을 넘어 독일과 뉴질랜드 등에서도 모금활동을 펼쳤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장애 어린이와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펴는 한편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런 활동을 펴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조차 합니다.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 권태선
  • 입력 2015.04.22 13:49
  • 수정 2015.06.22 14:12

"저는 한국 나이로 85살입니다. 저는 80년 동안 한국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의 삶은 속죄의 삶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목적은 한국인에게 사죄하는 것이고, 그 사죄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 분들이 저에게 이렇게 상을 주시니, 저로서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970년대부터 자신의 집까지 처분해 한국의 빈민들을 도왔던 공로로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의 제 1회 수상자가 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수상소감입니다. 2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이 상을 수상한 그는 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선 채,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를 격려하는 박수가 두 차례나 터져 나온 뒤에야 겨우,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한 반성은커녕, 왜곡까지 하려는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 부재에 대한 반성으로 수상소감을 시작했습니다.

제 1회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 수상자인 노무라 모토유키목사(오른쪽)와 그의 부인이 김성수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 조직위원장과함께 수상을 기뻐하고 있다. 아시아 필란트로피 어워드는 인간애를 바탕으로 인류의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부하고 이를 확산시킨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됐으며 첫 시상식은 2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그가 한일 두 나라 사이의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한 것은 그의 나이 겨우 다섯 살 때였습니다. 교토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멸시하는 것을 보고, 그 어린 나이에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의 마음 속에 그 때부터 조선 문제가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합니다.

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그는 여전히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일본 식민지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가족을 설득한 뒤 1973년 다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 방문에서 청계천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곳에서 빈민운동을 하던 제정구 전 의원 등과 만나면서 한국의 빈민들을 돕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5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매번 모금활동 등을 통해 마련한 돈을 빈민운동에 기부했습니다.

청계천 빈민촌이 철거된 뒤엔 남양주로 이주한 철거민들을 위해선 탁아소를 만들고, 그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당시 그가 청계천 빈민들에게 지원한 돈은 7500만엔(약8억원)이나 됐습니다. 오늘의 가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그 10배는 될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이런 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도쿄의 자택을 파는 등 사재를 몽땅 털어넣었고, 일본을 넘어 독일과 뉴질랜드 등에서도 모금활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청계천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했습니다. 자식들은 한때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도 했지만, 이제는 딸과 아들 며느리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에 대한 그의 사죄 활동은 빈민지원활동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청계천의 삶을 기록한 귀중한 역사자료를 서울시에 기증했고, 그 자료는 <노무라 리포트>라는 책으로 출간된 바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한국의 장애 어린이와 북한 어린이를 돕는 운동을 펴는 한편 일본인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비판하는 공개적 발언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놓여진 소녀상 앞에서 '봉선화'를 플롯으로 연주하며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한 게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2012년 2월 13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사죄의 헌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갈수록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이런 활동을 펴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조차 합니다. 우익들은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욕설을 퍼붓고 밤중에 협박전화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날 반둥회의 50주년 행사에 참가한 아베 신조 총리는 식민지배에 대해 결코 사죄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국제사회의 비난에 등 떠밀려 겨우 '반성한다'는 진정성 없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아베의 일본과 노무라 목사의 일본. 일본의 비극은 일본의 주류가 노무라 목사처럼 인간애를 바탕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온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양심적 지식인들의 헌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갈등 해결은 여전히 요원한 채로 남아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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