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이 60, 된장이 내게로 왔다

콩만 발효하란 법 있나? 사람도 발효해서 나쁠 것 없다. 발효 음식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로서 나도 우리도 발효 숙성의 주체가 될 수 있겠다. 1년 간 항아리에서 된장이 익는 동안, 된장을 담근 우리도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롭게 배우고, 상처 받으면서도 우정과 사랑을 멈추지 않기. 때로 세상살이의 씁쓸함 마저 웃음으로 녹여내는 그런 발효 인간이 될 수 있을까.

  • 정경아
  • 입력 2015.03.16 07:47
  • 수정 2015.05.16 14:12

3월의 두 번째 목요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묵리에 있는 한 된장 농원. 20명이 조금 넘게 모였다. '된장학교' 학생들이 된장 담그는 날이다. 음력 1월이 가기 전에 담가야 '정월장'이다.

농원 김 대표님의 안내로 황토방인 메주 발효실에서 메주 다섯 덩어리를 꺼내와 씻는다. 한 말 분량이다. 메주에 붙은 먼지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건데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된다. 씻은 메주를 다시 햇볕에 말리는 동안 깨끗한 항아리를 준비한다. 끓인 소금물이나 소주를 끼얹어 멸균시키는 방법도 있다. 오랫동안 된장을 담았던 항아리라면 굳이 소독할 필요는 없다. 메주 한 말, 즉 7kg 당 소금 5kg과 물 21kg의 비율이 적당하다는 교장 선생님의 설명. 시아천을 얹은 체에 소금을 놓고 물을 부으면 그 아래 놓인 양동이에 소금물이 내려오는 방식으로 소금물을 만든다.

적정 염도는 된장 담그기의 핵심 기술. 염도계와 날계란이 등장한다. 염도계로는 15에서 17도 사이. 날계란을 소금물에 띄워 500원 짜리 동전 크기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뜨는 상태가 딱 적당하다. 항아리에 메주를 앉히고 싸리나무 가지로 고정시킨 후 소금물을 부으면 완성! 싸리나무 가지는 단맛을 더해주고 잡균 발생을 억제하는 효과가 뛰어나다고 농원 대표님이 설명해 준다.

이 모든 게 그저 즐거운 된장학교 학생들의 파티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소품은 볏짚으로 만든 금줄. 서툰 솜씨로 얼기설기 엮은 새끼줄에 숯 세 조각과 마른 홍고추 세 개, 소나무 잎 세 조각을 끼워 넣어 항아리에 두른다.

한 인문학습원의 여러 학교 중 하나인 된장학교는 3월 첫 주 개강했다. 9개의 연속 강좌가 4월 말까지 이어진다. 뜬금없이 된장학교 새내기가 된 건 내 '회갑 맞이' 기념행사 중 하나다. 시어머니께서 만들어준 된장을 30년 먹어왔던 내게 맛있는 된장찌개 끓이기는 숙원 사업이다. 심지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내 입에 맞는 된장을 끓이려 된장의 명인들을 검색하고 이곳저곳 수소문해 된장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김치냉장고 안에는 얻어왔거나 사들인 된장들이 여럿 장기 투숙 중. 정말이지 열 사람이 만든 된장은 열 가지 맛이다. 그것이 된장의 무한 매력이려니!

내 딴엔 제대로 된 된장을 구하는 방법이나 알 수 있을까 해서 입학한 된장학교. 그런데 뜻밖이다. 5명의 남성을 포함한 22명의 학생들의 배경이 실로 다양하다. 나이는 20대부터 70대 까지. 프랑스의 요리 명문 학교인 르 꼬르동 블뢰 입학을 앞두고 미리 한국 전통 장류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왔다는 여성, 북한에서 이미 된장, 간장을 담가왔고 앞으로 장류 식품 사업을 하고 싶다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새터민, 경기도 연천에서 보리밥집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사장, 퇴직 경찰관, 돈만으로 은퇴 준비가 끝나는 건 아니라고 열변을 토하는 재무설계사. 그녀는 산약초 공부와 된장 만들기를 병행 예습하며 은퇴 후 활동 영역을 구축하고 있단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된장을 담가왔다.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된장 제조 기능을 계승했음에도 발효를 전문적으로 배우겠다는 게 입학 동기란다. 대부분 된장 뿐 아니라 발효 3총사인 간장과 고추장까지 제 손으로 만들어 식구들에게 먹이고 싶은 의욕이 넘친다.

된장학교를 수료한다고 해서 자격증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남에게 멋있어 보이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학벌과 아무 상관없는 된장 공부에 빠져든 사람들. 요즘 말로 자기주도 학습의 열기다.

6주 후인 4월 23일, '장 가르기'가 예정돼 있다. 메주를 건져내고 된장을 치대어 된장 항아리에 담는다. 간장은 따로 간장 항아리에 붓는다. 그로부터 1년 후 된장을 먹을 수 있다. 제일 맛있는 시기는 담근 지 2년이 지날 무렵의 된장이라고 한다.

발효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먼저 콩이 온갖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메주로 거듭난다. 1차 발효다. 거기에 소금과 물이 합해져 된장과 간장이 되는 2차 발효가 일어난다. 사람과 자연의 콜라보. 달리 말해자면 햇빛과 바람과 시간의 협업이다. 콩에서 된장, 또는 간장으로 탄생하는 발효 숙성은 변화의 긴 여정이다. 어둠을 견뎌야 하고 추위와 더위를 통과해야 한다. 발효는 콩을 된장으로 변화시키면서 원래의 것과 새것의 경계를 긋지 않고 하나로 이어주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근데 콩만 발효하란 법 있나? 사람도 발효해서 나쁠 것 없다. 발효 음식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로서 나도 우리도 발효 숙성의 주체가 될 수 있겠다. 1년간 항아리에서 된장이 익는 동안, 된장을 담근 우리도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롭게 배우고, 상처 받으면서도 우정과 사랑을 멈추지 않기. 때로 세상살이의 씁쓸함 마저 웃음으로 녹여내는 그런 발효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된장에게 한 수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된장 #메주 #자기주도학습 #발효 인간 #된장학교 #된장농원 #숙성 #음식 #발효음식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