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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 영화감독 김경묵, 재판에서 감옥까지

  • 박세회
  • 입력 2015.03.08 06:38
  • 수정 2015.03.08 06:40
ⓒ한겨레

베니스, 로테르담 영화제 등에서 초청되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독립영화 감독 김경묵(30)씨는 두달째 서울남부구치소에서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 해결을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는 2008년 국민정서를 이유로 전면 중단됐다. 정부와 국회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법원에서는 최근 3년 사이 7차례의 위헌 제청이 나오는 등 일선 판사들의 문제의식이 비등점을 향해 끓고 있다.

유엔자유권규약위원회도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를 ‘자의적 구금’이라고 결정하며 이 조약에 가입한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김경묵 감독은 지난 1월14일 오전 수감되기 직전의 재판을 앞두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렇게 할까요?” 하면서 두 손으로 철창을 잡는 시늉을 했다. 비가시적인 철창으로 둘러싸인 학교를 뛰쳐나와 그는 사회적 통과의례 밖에서 영화 경력을 쌓아왔다.

그는 20여분 뒤 법정에서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신체의 자유마저 결박된 가시적 철창의 공간으로 입소했다. 지난 2월2일 현재 636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국 구치소,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헌법재판소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위헌 법률심판은 올가을께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14일 <줄탁동시><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등을 연출한 김경묵 감독은 서울서부지법에서 병역법 위반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김 감독이 1~3월 <한겨레>에 보낸 글, 편지들.

군대 안 갔다는 힐난 못 견디고 독거방으로 옮기다

1월14일 아침 김경묵(30) 감독은 가방을 쌌다. 칫솔 두개, 내복, 스웨터 그리고 책 세권을 넣었다. 베이지색 가방에는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이 달렸다. 전날 밤 친구들과 긴 이야기를 나누고 아침밥을 챙겨 먹고 오느라고 재판 10분 전에야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도착했다. 건물 뒤편에서 마지막 담배를 피웠다. 선배 양심적 병역거부자 이승규(2005~06년 수감)씨와 길수(2012~13년 ˝)씨가 구금 뒤에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었다. 놀라지 마라, 수갑 차고 포승줄 맨다, 밥은 구치소에 가서 먹을 수 있을 거다….

오전 10시 김경묵 감독의 병역법 위반 혐의 재판이 열리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법 제406호 법정 앞 복도는 오랜만에 웅성거렸다. 20여명의 응원군 중 대다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선배들이었다.김 감독이 법정에 들어가자마자 ‘피고인 김경묵은 나오시오’라는 말이 울렸다. 사무적인 목소리를 가다듬고 판사가 말을 이었다.

“피고인이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또다시 중복 형사 처벌되지 않도록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합니다. 피고인 할 말 있으면 더 하십시오.”

“여러 사정을 선처해주신 재판부와 친구들께 감사드립니다.”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합니다. 구금영장을 발부합니다.”

“그래, 잘 왔어”라는 묘한 인사

<한겨레>는 병역법 위반 혐의로 첫 재판을 나간 지난해 11월19일부터 지난 1월14일 수감 그리고 최근까지 영화제 등 행사 참관, 인터뷰, 서신 교환 등의 방법을 통해 그를 지켜봤다. 또한 김경묵 감독이 서울남부구치소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시작한 수형생활을 들여다봤다.

판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교도관이 그의 팔을 붙들고 문밖으로 데려갔다. “이미 머릿속에서 무수히 시뮬레이션하며 그려보았던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방청석에 있는 친구들도 놀랄 것 같아 그들을 향해 웃으며 손인사를 보냈다.” 김경묵 감독은 시나리오(S)의 한 신처럼 토막토막 써 보내온 글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의 풍경을 전했다.

S#6. 1월14일 오전 10시20분: 구치감

법정 문 뒤로 오니 그곳에는 한발의 간격을 두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50여명가량의 죄수복을 입은 재소자들이 구치소에서 출정 나와 재판 대기 중인, ‘구치감’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법정이 엄숙했다면, 구치감은 음습했다. 마치 도살장의 가축을 보는 듯 암울함과 불편한 긴장감이 지배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단테의 <신곡>.

‘이곳에 들어온 자, 그 어떤 희망도 포기하라.’

지옥문에 들어선 표정으로 서 있으니 교관이 서류를 보고는 묻는다.

“병역법 위반이야?”

“네.”

그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며 미소를 보인다. 난 영문도 모른 채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래, 잘 왔어.” 이 말과 함께 팔목에 수갑을 채운다.

‘잘 왔다니’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이런 태도가 일반적으로 법정구속인을 맞이하는 그의 방식인가 싶어 계속 지켜봤으나 그렇진 않았다. ‘막 구속된 이를 놀리려던 것은 아닐 텐데… 그럼 나를 환대해준 건가?’ 그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구속 후 처음 들은 말 치고는 따뜻한 인사였다.

S#7. 정오: 호송버스

출정 온 이들의 모든 재판이 끝나자 채워진 수갑 위로 포승줄이 묶이기 시작한다. 생애 처음 맞는 구속, 첫 수갑, 그리고 첫 포승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마지막’이었던 것이 이제부터 겪게 될 모든 일들 앞에는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달게 될 것이다.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차량에 탑승한다. 버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가 없었다. 유령의 시점이 있다면 이와 같으리라. 그렇게 바라본 도시 풍경은 묘하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S#8. 오후 1시: 남부구치소

경직된 직사각형 디자인의 잿빛 건물, 과거 중·고등학교의 갑갑한 건축구조를 닮은 구치소 안.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시시티브이(CCTV)가 긴장감을 더한다. 먼저 입고 온 의류와 신발을 벗고 소지품과 기본 인적사항을 검사한다. 이후 교관의 안내에 따라 샤워를 하면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칙칙한 죄수복으로 갈아입게 된다.

이 와중에 수감되면 사용하려고 챙겨온 노트, 수건, 내복 등은 반입불가라 한다. 어차피 수형 중 자비로 구매가 가능한 물품인데, 왜 반입이 안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넘쳐날 것이다. ‘처음이니까’. 그럴 때마다 ‘왜’라고 질문하면 괴로운 징역살이가 될 거라 생각하니 갑갑함과 막연한 두려움이 다가온다.

2013년 작품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제작 현장.

나는 왜 적응하지 못하는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날은 “그전까지 살아온 배경이 연극의 스테이지 전환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낯설고 두려운 무대가 등장”한 날이었다. 김경묵 감독은 다른 삶으로 통하는 입구에 섰다. 군대 아니면 감옥이라는 선택지에서 감옥을 선택했다.

병역거부 의사를 밝힌 건 지난해 5월이었다. 20대 초반 징병검사 때부터 병역거부를 생각했고 더는 미룰 수만은 없었다. 5월13일 입영통지일을 받고 연기신청을 하지 않았다. 원래 수줍은 소년이었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자퇴를 하고 나와 혼자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지난 1월12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어요. 왜 학교에 가야 되는지 몰라서요. 고등학교 가니까 진짜 못 가겠더라고요.” 집단생활과 시공간의 구속, 학생들끼리의 경쟁, 편가르기와 왕따 등 학교의 일상 문화를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그에게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왕따를 당하는 한 친구가 있었어요. 그날 그 친구의 교과서를 애들이 물양동이에 집어넣었죠. 용기를 내어 왕따 당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담임선생님과 교육청에 이야기해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싫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충격이었어요. 당하는데 왜 말하지 못할까.”

학교, 군대 어쩌면 우리 사회도 내장하고 있을지 모를 기괴한 구조와 행동양식을 그는 어렴풋이 깨달은 듯했다. 그가 말했다.

“군대는 더더욱 지낼 수 없는 공간이었죠. 난 왜 군대를 갈 수 없을까, 스스로에 대해 묻고 사회에 대해 물었어요. 왜 나는 적응 못 할까.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는 아닐까.”

병역법 위반 혐의의 재판은 두번 진행됐다. 첫 재판에서 검찰이 구형했고, 두번째 재판에서 판사가 선고했다. 법리 논쟁은 없었다. 지난해 11월19일 첫 재판에서도 검사와 판사, 변호사가 대여섯 마디 주고받더니, 피고인인 김 감독에게 최후진술 기회를 준 게 전부였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투지 않는다.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판사가 무죄를 내리더라도 상급심에서 판단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2004년, 2007년 두차례 무죄가 났지만, 대법원은 최종 유죄로 판결했고, 헌법재판소 역시 두차례 합헌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병역법 시행령에 따라 재징집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형량인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한다.

김경묵 감독이 원하는 건 차분히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원하는 날짜에 감옥에 가는 것이었다. 재판부도 1월14일을 선고기일로 잡아주었다. 김 감독은 선배 병역거부자들이 쓴 <병역거부 가이드북>을 읽으며 감옥 생활을 익혔고 제주도로 마지막 여행을 갔다 왔다.

추위가 한층 누그러졌다. 김 감독이 구금된 지 일주일 뒤인 1월21일 오전 서울 천왕동의 남부구치소 면회대기실에는 번호표를 뽑는 ‘딩동’ 소리, 휴대전화로 흡수되는 면회객의 욕지거리 그리고 문을 열면 ‘쏴아’ 하는 바람소리가 반복됐다. 전자게시판에 수감번호가 뜨면 면회실로 들어간다. 면회시간은 10분. 수감번호 2339. 김경묵 감독은 노란 수감복을 입고 있었다.

“동료 재소자들이 그러는데, 남부가 새로 지은 데라서 가장 따뜻하대요.”

두껍고 투명한 유리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대화는 녹음장치를 통해 녹음된 뒤 스피커로 중계됐다. 한방에는 모두 7명이 산다고 했다. 방 분위기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그리 좋은 편도 아닌 듯했다. 방 안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게이 조크’를 많이 한다고 했다.

“글을 쓰니까 오히려 생활을 버티는 데 좋아요. 시간은 별로 없어요. 방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요.”

그는 기자와 만나서 할 얘기를 미리 작은 종이에 촘촘하게 써가지고 왔다. 1분 남았다는 알람음이 울렸다. 말이 빨라졌다. 퇴장을 알리는 음악이 쩌렁쩌렁 울렸다.

지난해 11월19일 첫 재판 그리고 1월14일 서부지법에서 1년6개월 징역 선고 뒤 수감. <한겨레>는 이 과정 지켜보며 그를 인터뷰했고 편지 교환했다. “한방에 있던 40대 아저씨가 군대를 소재로 유난히 괴롭혔다 어느날 가족까지 들먹이길래 분노가 치밀어올라 응수했다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사내자식이… 국민 자격도 없다”는 비난

S#10. 1월17일 오후 3시: 신입방

구치소에 수감된 지 사흘이 지났다. 재판을 받고 실형이 확정된 이들이 수감되는 교도소와는 달리, 구치소는 미결수 상태로 재판 중인 이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다. 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기간이 남았기에 구치소에서 한두달간을 지내다 근방의 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된다.

구치소에 수감이 되면 먼저 ‘신입방’이라는 곳에서 닷새가량 지내며 수형생활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두평 남짓한 공간에서 다섯명이 붙어 지내야 했지만, 다들 처음 실형을 선고받은 뒤 정신적인 충격에 항소를 준비하느라 지쳐 있어 별달리 부딪힐 일은 없었다. 항소를 준비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하루빨리 이곳을 나갈 기대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형량이 거의 정해져 있다시피 한 병역거부의 경우에는 항소하여 무죄가 나온다 할지라도 상고에서 다시 유죄로 확정된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번도 예외는 없었다. 말하자면 내게는 항소할 명분이 없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일지.

S#11. 1월31일 오후 5시: 혼거방 사람들

보통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된 이들은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독거방에 수용된다. 그러나 나와 같은 병역거부자는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으로 분류되어 여러 사람과 함께 지내는 혼거방(본방)으로 간다. 신입방에서는 다들 초범이라 서로 조심하며 생활했지만, 본방으로 방을 옮긴 뒤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본방에는 짧게는 두세달 길게는 일년 이상 구속되어 재판 중인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선고 확정이 나지 않아 하루하루 불안과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지내고 있었다. 세평가량의 공간에서 일곱명의 성인 남성들이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환경의 압박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나의 경우는 ‘병역거부’라는 죄명이 그보다 더한 문제가 되었다.

으레 방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무슨 죄로 얼마의 형량을 받고 온 것인지 묻기 마련이다. 난 병역법 위반이라 답했다. 반사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냐’고 묻는다. 한해 700여명가량의 병역거부자가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되는 실정인 만큼, 구치소 내에서도 병역거부자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군사훈련을 거부한 이들과 달리 나처럼 개인의 신념을 이유로 수감된 사람은 극히 소수다. 지난해에는 7명이, 올해는 아직까지 나만 수감된 상태다. 여호와의 증인도 아니면서 군복무를 거부(그들에게는 병역을 ‘기피’)한 나에게 온갖 힐난이 빗발친다.

“사내자식으로 태어나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리고 싶으면 대한민국 국민 자격이 없다.”

“너처럼 다 군대 가지 않으면 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너 같은 놈들은 전쟁 나면 가족도 버리고 먼저 도망갈 궁리를 하겠지.”

‘한국은 북한과 전쟁 중인 나라’라며 격렬하게 반응하는 두사람이 있었다.

사기로 구속된 40대 아저씨는 이후로도 유난히 군대를 소재로 나를 괴롭혔다. 나이도 가장 어리고 방에서도 신참이라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난 잠잠히 듣기만 했다. 어느 날 그가 가족까지 들먹이며 ‘군대 안 가니 효자라고 부모님이 좋아하더냐’는 말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한마디 응수했다.

“저는 군대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군사력이 강하고 방위산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일수록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킵니다.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과 권력 때문이죠. 저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두지 않은 채 국가의 노예마냥 군 복무를 강제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처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사장님의 사기죄를 가지고 떠들어대지 않듯이 서로의 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당하게 반박했지만 ‘도대체 왜 내가 저런 미친놈으로부터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나’ 싶어 서럽고 분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가 불쌍했는지 그날의 논란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병역기피자’로서 난 지나치게 당당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재향군인회 소속 임원이었고, 방의 또 다른 이는 본인을 포함하여 집안의 삼부자가 특전사 출신의 군인 가족이었다. 그날의 발언으로 인해 두사람에게 미운털이 확실히 박히게 됐다.

그들에게 군 경력은 희생인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의 근원이기도 했다. 반면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나와 같이 ‘정신상태가 글러먹은 남자’는 분노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것이다.

이후로도 재향군인회 아저씨는 방 고참이라는 명분으로 나에게 ‘계집애 같다’며 ‘남자답게 행동하는 법’을 매일같이 전수해주셨다. 운도 지지리 없지 ‘어떻게 이런 군인 사랑방에 갇히게 되었는지’ 신세 한탄을 해본들, 다수의 남성이 현역 제대를 한 사회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내가 특이한 경우이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평균일 것이다(반면에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아주 싫어했는데, 자신이 이번 정권 때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겨울에 수감되었으니 지인들은 추위로 인해 고생할까 걱정했지만, 막상 들어와 생활해보면 어디에서 지내건 시설보다도 어떤 사람과 함께 지내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된다. 사람 리스크가 가장 큰 곳을 뽑자면 군대와 감옥이 아닐까 싶다. 싫다고 나가거나 그만둘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 군대, 감옥의 어떤 연쇄

S#12. 오후 7시: 징역의 군사주의

“군대 가서 고생 안 하면 군대가 아니다”라고 흔히 하는 말에서 군대를 ‘징역’이라 바꾸어도 낯선 감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징역 생활이 군사화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남성 중심인 대다수의 대한민국 조직문화가 근본적으로 군대식 계급체계를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서는 하루 세번 인원 점검을 하는데 군대의 점호와 그 형식이 거의 똑같다. 교관이 방 번호를 부르면 방안에서 행과 열을 맞춰 정자세로 앉아 남자(군인)다운 목소리로 본인의 번호를 외쳐야 한다. 이때 목소리가 작거나 입고 있는 관용복과 방안의 관물대, 모포 등의 각이 살아있지 않으며 훈계를 들어야 한다(이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징벌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번 15분간, 외부접견은 한달에 네번 10분간, 운동은 하루 한번 30분간으로 엄격하게 지켜지지만, 이마저도 공휴일에는 모두 불가능하다.

관의 관리체계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재소자의 관계 역시 방에 들어서는 순간 명확히 서열이 정해진다. 중요하게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 방에 먼저 들어온 순서와 나이의 역학으로 등급이 매겨진다. 본인이 ‘빵잽이’(수차례 교도소에 수용된 자)라면 이 역학을 무시하고 방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도 있겠으나, 이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두가지로 서열이 정해진다.

나이로도 ‘짬밥’으로도 가장 아래 순위인 난 ‘막둥이’라 불리며 하루 종일 긴장된 상태로 방의 쫄따구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시어머니보다 더 호되게 잔소리를 해대던 재향군인 아저씨는 군기가 잔뜩 잡힌 내 모습을 보며 흡족해하셨다. 여자 사동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듣기로는 여 사동은 이와 같이 경직된 군사문화는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유별나게 군사화된 남자 수형소가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군대라는 남자들의 집단문화가 학교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듯하다.

군사주의 문화에 순응하기 싫어 병역을 거부한 내가 순수 마초 남성들의 세계인 감옥에 걸어 들어온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 아니면 감옥이라는 대안 없는 현실에서 그 두 세계는 목적하는 바는 다르나 쌍둥이와 같이 서로가 닮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전쟁놀이 대신 인형놀이 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등 다수에 초청받은 김경묵 감독의 영화 <줄탁동시>.

고교 자퇴하고 혼자 영화공부,

군대는 더더욱 갈 수가 없었다

내 소극성, 온순함, 여자 같음은

군대로 극복할 대상 아닌 정체성”

“‘두려움’ ‘겁쟁이’란 말 와닿는다

내가 누군가를 때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내가 폭력을 가할 수 있도록

길들여진다는 깨달음…”

10년 동안 망설였다, 징역살이가 두려워…

지난해 11월30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서울독립영화제의 부대행사로 김경묵 감독의 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영화제에는 영등포 성매매 여성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유예기간>이 출품됐다. 토크콘서트 포스터에서 그가 보랏빛 꽃을 들고 외친다. “죽음을 부르는 군대를 거부한다.”

토크콘서트 게스트로 나온 영화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이 자신의 의정부 보충대 입소 경험을 떠올렸다.

“연병장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집총 거부자 일어나.’ 정적을 깨는 소리. 뭔가 놀라웠어요.”

총을 들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50명의 사람이 있다면 50개의 양심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새삼 머리에 박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존재하고 있었으나 말하여지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었다. 소수자의 양심은 무시되어도 문제되지 않았다.

<한겨레21>이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처음 보도한 2001년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와 우리 사회 사이 인권의 거리를 가늠하는 지표로 부상한다. ‘왜 병역거부를 결심했느냐’는 말에 김경묵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어렸을 적부터 군대를 본능적으로 싫어했습니다. 아이들이 전쟁놀이하고 비비탄 쏠 때, 나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지요. 그때부터 군인이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어요.”

1월12일 인터뷰에서는 “만약 군대에 가 있다면 모습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굉장한 관심사병이 되어 있겠죠. 더 큰 문제를 가졌을 거 같아요.”

그는 자신의 소극성, 온순함, 여자 같음이 군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단점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정체성이자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한 거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회적 통과의례를 우리는 꼭 거쳐야 하는가? 그래야 정상성을 획득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김경묵 감독은 사회적 통과의례의 관문들 밖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유년시절 성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첫 단편 <나와 인형놀이>를 만들었고, 이후 <얼굴 없는 것들>, <청계천의 개>를 완성하며 독립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2011년 작품 <줄탁동시>는 제68회 베니스영화제 등 세계 영화제에 초청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의 에너지는 주류에서의 경쟁과 승리 욕구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긍정이었다. 병역거부도 이런 선상에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얘기할 때, 평화주의적 신념, 국가폭력, 종교적 신념 등 조금은 거창한 단어를 쓰는데, 나는 ‘두려움’과 ‘겁쟁이’라는 말이 와닿았어요. 내가 누군가를 때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두려움, 내가 누군가에 폭력을 가할 수 있도록 길들여진다는 깨달음….”

지난 1월 수감 전 마지막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찍은 자신의 모습.

S#13. 2월2일 오후 9시: 낯선 천장

오후 9시 취침, 오전 6시 기상. 감방의 밤과 낮은 바깥보다 일찍 찾아온다. 취침시간에도 재소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백열등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나의 취침 자리는 화장실 앞, 쓰레기통 옆이다. 수감된 지 벌써 4주가 다 됐지만 여전히 잠들기 전 바라보는 천장은 낯설기만 하다. 아직까지도 바깥세상을 떠올리면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내가 어쩌다 이 낯선 천장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상념에 젖어들고는 한다.

지난 10년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망설임이었다. 병역거부에 따른 징역살이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불복종으로 인한 국가의 처벌이 무섭지 않은 강철의 투사이기보다는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무참히 짓밟는 군체제가 두려워 여기까지 오게 된 나약한 인간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병역거부는 강제적 군복무라는 막다른 길목에서 마주쳤던 무력과 불안, 환멸과 분노, 외로움과 고립감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택했던 결과였다. 어쩌면 내가 궁극적으로 선택한 것은 이전의 나를 비우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감옥에서 겪게 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두렵고 막막하지만, 또한 뜻하지 않은 삶의 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혼거방에서 그는 힘들어했다. 고문관 대하듯 하는 동료 재소자들의 시선과 말투를 견디기 쉽지 않았고 “막내답게 펜 대신 걸레를 들고 있”어야 했다. 그를 면회한 지인으로부터 그가 어쩔 수 없이 독거방으로 옮겨달라고 구치소 쪽에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월 중순 김경묵 감독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독거방으로 옮겼다고 했다.

그는 좀 안정을 찾은 듯했다. 3월6일 받은 편지에는 “(신문사에 보낸 글을) 다시 보니 당시 고생했던 때의 격한 감정들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그때보다 여유가 있어요. 심심할 때도 꽤 있구요”라고 말했다. 1년6개월의 수형생활 중 그는 두달을 통과하고 있다. 앞으로 1년하고 넉달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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