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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썬·미투 이후 : 대중은 이제 ‘정의’의 이름으로 스타 인성 검증에 나서고 있다

실력보다 인성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연예인 논란 다룬 기사 제목 
연예인 논란 다룬 기사 제목  ⓒ한겨레

 

드라마 <1리터의 눈물>로 스타가 된 일본 배우 사와지리 에리카는 거만하고, 무성의한 태도 때문에 배우 인생에 위기를 겪었다. 2007년 이른바 ‘베쓰니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자신이 주연한 영화 <클로즈드 노트> 제작보고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재차 물어도 “베쓰니”(별로)라고 말하며 사회자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사와지리의 건방진 행동에 대중은 분노했고, 결국 그는 며칠 뒤 눈물의 사죄 방송을 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사와지리의 인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결국 그는 1년간 연예계를 떠났다.

‘베쓰니 사건’이 알려졌을 당시 한국 팬들은 대중이 톱스타를 퇴출시켰다는 점에서 적잖이 놀랐다. 인식의 차이가 컸다.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내 스타’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아껴주나?” 14년이 지난 2021년 우리는 매일 ‘베쓰니 사건’을 마주한다. 자고 일어나면 인성 나쁜 연예인의 이름이 인터넷에 폭로된다. 지난달 10일 배구계의 이다영·이재영 쌍둥이 자매 사건으로 촉발된 소위 ‘학폭(학교폭력) 미투’가 줄 이은 한달 동안 거론된 유명인만 약 20명에 이른다.

학폭 가해 사실을 인정한 배우 지수는 연예계에서 사실상 퇴출당했고, 같은 그룹 동료를 왕따시켰다는 의혹을 받는 에이프릴 나은은 출연 예정 드라마 <모범택시>(에스비에스)에서 하차했다. 마치 전국민이 질 나쁜 연예인을 걸러내는 선별 작업을 진행하는 모양새다. 연예계 관계자들은 “이젠 실력보다 바른 인성이 연예인의 생명줄이 된 형국”이라고 말한다.


‘버닝썬’ ‘학폭’ 거치며 실력 넘어 인성에 관심

승리와 정준영 
승리와 정준영  ⓒ뉴스1

 

연예인의 인성이 대중의 관심 사항이 된 것은 2014년 ‘이병헌 50억 협박 사건’ 때부터다. 사건과 별개로 유부남이 젊은 여성들과 어울린 것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영화 <내부자들> 개봉 직후 여론은 갈렸다. 한 영화 담당 기자는 “이병헌이 <내부자들>에서 역대급 연기를 선보이면서 처음으로 실력과 사생활을 연결해야 하는지, 별개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이미지로 먹고살던 연예인의 민낯이 드러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인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2018년 문화예술계 성추행·성폭행 문제를 고발한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시작으로 2019년 승리·정준영이 중심이 돼 불법 촬영물 유포 등의 범죄를 일삼은 ‘버닝썬 사건’, 최근 폭발하고 있는 학폭 미투를 거치며 대중의 눈길은 ‘실력보단 인성’에 쏠리고 있다. 빅뱅 승리의 팬이었던 한 40대 직장인은 “버닝썬 사건 이후 내가 범죄자를 좋아하고 응원했다는 사실에 충격이 컸다”며 “연예인의 실체가 까발려지는 각종 사건을 겪으며 팬들 사이엔 부족해도 열심히 하고 심성이 올바른 사람을 응원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전했다.


공정·정의에 대한 열망…내 일처럼 연대

배우 지수
배우 지수 ⓒ뉴스1

 

지난 2일 지수의 학폭 의혹이 처음 제기된 이후 한국방송(KBS) 시청자권익센터에는 ‘심각한 학교폭력 가해자 지수를 하차시키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은 하루도 안 돼 3000명이 동의했다. 지난달 24일 학폭 논란에 휩싸인 배우 박혜수가 주연하는 드라마 <디어엠>(한국방송2)의 방영 연기를 요청하는 청원은 12일 오후 기준으로 3100명 이상이 동의했다.

대중은 피해 당사자가 아님에도 이런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피해자의 감정에 이입해 함께 가해자를 꾸짖었다. 구아무개씨는 <디어엠> 청원글에서 “학교폭력 논란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혜수를 10~20대를 주 타깃으로 하는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내세워) 방영하는 것은 공공의 가치에 어긋나는 편성”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가해자가 인정하고 사과하고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계속 연대하고 있다. 한 방송사 간부는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메일을 보내고 청원에 동참하는 등 많은 사람이 마치 자기 일처럼 반응하는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공정성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분노를 투영한 움직임이라고 분석한다.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최근의 엘에이치(LH) 사건에서 보듯,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현실에 실망감을 느낀 이들이 내가 참여해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다”고 짚었다.

유명 연예인은 혼자 상대하기엔 강자이지만, 약자인 대중도 연대하면 응징할 수 있다는 생각과 더이상 나쁜 사람이 잘 먹고 잘살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분노가 응집된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종임 이사는 “글을 올리자마자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이 사과하고 활동을 중단하는 등 빠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은 피해자를 도와 정의를 바로 세웠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가 된 사생활…스타의 가치는 인성

지민 
지민  ⓒKwonHyonJin

 

발빠른 연대가 가능한 이유는 이 시대에 ‘선함’이 연예인의 필수적 가치가 됐기 때문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엔 대중에게 연예인이 그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이젠 유튜브나 에스엔에스를 통해 콘텐츠가 된 스타의 사생활을 대중이 공유하게 됐다”며 “예전에는 예술적 재능을 사랑했다면 이젠 사생활에서도 훌륭한 인성을 기대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침대에 누워 있는 스타를 만나고, 밥 먹는 스타와 대화를 하는 등 마치 친구나 애인처럼 일상을 공유하기에 이른 현실이 ‘인성’에 대한 대중의 민감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스타성만 있으면 과거 잘못을 적극적으로 덮어줬던 기획사의 상업주의도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창구가 늘면서 쉬쉬하던 내부의 문제도 쉽게 폭로되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레드벨벳 아이린에게 폭언과 갑질을 당했다는 한 스타일리스트의 폭로가 소셜미디어를 달궜다. 이후 다른 이들이 “나도 당했다”고 증언하면서 아이린은 공개사과했지만, 그의 인성이 도마에 오르며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다.

에이오에이(AOA) 멤버였던 지민은 민아가 자신이 괴롭힌 사실을 폭로하면서 지난해 7월 그룹을 탈퇴하고 연예계 활동을 중단했다. 스태프를 향한 폭언·갑질이나 멤버 간 불화·왕따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외부로 잘 알리지는 않았던 과거에 견줘 크게 변화한 양상인 셈이다. 권력관계에 예민하고 정의와 공정에 민감한 엠제트(MZ)세대(1990~2000년 사이 출생한 밀레니얼세대와 제트세대를 아우르는 단어)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윤리를 소비하는 시대…구조적인 문제 해결로 나가야

MBC '나 혼자 산다'
MBC '나 혼자 산다' ⓒMBC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예인들은 대중이 민감해하는 ‘인성’을 인기를 얻기 위한 전략적 상품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일상을 보여주는 관찰예능이 늘면서 연예인들은 이미지를 쉽사리 포장한다. 하지만 이는 ‘역풍’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나 혼자 산다>(문화방송)에 나온 박은석은 애견인으로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지인을 자처한 이가 “수시로 반려견을 파양했다”고 폭로했다. <미스트롯2>(티브이조선)에 나온 진달래의 학폭을 폭로한 이는 “티브이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비치고 착하고 따듯한 사람으로 미화된 것이 고통스러웠다”고 주장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학폭 폭로가 늘어난 데는 포장된 일상을 보여주는 관찰예능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의 모습과는 딴판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상황이 피해자의 참았던 분노를 자극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기획사들은 버닝썬 사건 이후 연습생을 뽑을 때 인성을 주요 체크리스트로 삼는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소속 연습생이나 연예인의 인성 교육도 철저하게 한다”며 “이번 사태 이후에도 학폭 등과 관련해 다시 한번 점검했다”고 말했다. 소속사가 이렇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스타의 ‘나쁜 인성’이 결국 큰 손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95% 사전제작을 한 탓에 지수의 학폭으로 재촬영을 하게 된 <달이 뜨는 강>의 경우, 수백억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등 방송·제작사의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출연 계약서를 쓸 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와 관련한) 계약 조건을 강화하는 등의 조처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폭로와 사적 응징에 매몰되기보다는 문제 발생의 근원적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구조적인 해결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래전 벌어진 폭력·왕따 사건이 뒤늦게 터져 나오는 것은 애초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이종임 문화사회연구소 이사는 “학폭이 일어났을 당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때 해결됐을 것이다. 기획사 역시 인성 관리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룹 내 왕따·갑질·폭언은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문제가 불거지면, 그때마다 개인을 끌어내리는 데서 끝날 게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되짚어 교육 등 구조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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