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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31일 16시 50분 KST

'얼굴 없는 천사' 기부금 절도범들이 유튜브 검색결과를 바꿨다

‘전주 절도 사건’을 정리했다.

뉴스1
30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에서 '얼굴없는 천사'의 기부금을 훔쳐 달아난 용의자들이 검거되어 청사로 압송되고 있다.

20년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지 않고 선행을 베푼 ‘얼굴 없는 천사‘,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에 찬물을 끼얹은 절도범, 그리고 절도범의 빈틈을 포착해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제보를 한 시민. 엉뚱하게 쓰일 뻔 했던 기부금은 무사히 제 용도대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일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이 한 편의 영화 같다. 30일 하루 동안 무척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전주 절도 사건’을 정리했다.  

 

전주 가는 길, 물 묻힌 휴지로 번호판을 가리다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30대 남성 A씨는 어느 날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된다.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어 ‘얼굴 없는 천사’라 불리게 된 기부자가 20년째 매년 크리스마스 전후가 되면 전주 노송동주민센터에 거액의 성금과 편지를 두고 사라진다는 사연이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해에도 12월 27일 오전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에 5000만원 가량이 든 A4용지 상자를 두고 갔다. 상자 안에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시지가 적힌 편지도 들어있었다. 그의 선행은 2000년부터 시작됐다. 지난해까지 19년째 그가 주민센터에 두고 간 성금 총액은 6억834만660원이다. 그가 건넨 성금은 4900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등으로 전달됐다. 

선행에 찬물을 끼얹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A씨. 그는 공주에 살고 있는 고교 1년 후배 B씨에게 ‘기부금을 훔치자’고 제안한다. B씨는 A씨의 제안을 들아들여 둘은 의기투합을 하게 된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을 훔친 절도범이 봤다는 유튜브 검색 결과가 31일 바뀌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 영상과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을 훔친 절도범 영상이 나란히 올라와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이들은 범행당일인 30일 0시 무렵 논산에서 출발했다. 전주로 가는 길엔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 휴지에 물을 묻혀 번호판에 붙였다. 주민센터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 이들은 차량 안에서 계속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되자 누구가 나타나 주민센터에 상자를 두고 사라졌다. ‘얼굴 없는 천사’였다. A씨와 B씨는 돈을 훔쳐 논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이들은 논산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범행이 들통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이들은 범행 2~3일 전부터 논산과 전주를 오가며 주민센터 인근에서 ‘얼굴 없는 천사’의 상자를 훔치기 위해 잠복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때는 번호판을 가리지 않았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을 훔친 절도범이 봤다는 유튜브 화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 영상과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을 훔친 절도범 영상이 나란히 올라와있다.

‘얼굴 없는 천사’의 기부금 도난 신고가 접수되다

30일 오전 10시 3분쯤. ‘얼굴 없는 천사’는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직원에게 ”(주민센터 인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성금이 담긴 종이박스를 놓아뒀으니 살펴보세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천사공원에는 상자가 없었다. 30분 넘게 샅샅이 찾았지만 끝내 상자를 발견하지 못한 직원들은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면서 10시 40분쯤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은 주민센터의 신고를 다급하게 현장으로 달려가 조사를 시작했다. 이때 한 시민이 결정적인 제보를 했다. 절도범들의 차량 번호였다. 제보를 한 시민은 ‘평소 동네에서 보지 못한 데다 번호판이 흰색 물체로 가려져 있던 차가 있어 번호를 적어놓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주민센터 주변 CCTV에 촬영된 용의 차량을 추적해 절도범들을 특정할 수 있었다. A씨는 충북경찰청 소속의 한 형사가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형사는 A씨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너 어디야. 지금 만나자’고.

 

형사의 전화를 받은 절도범들이 어쩔 줄 몰라하다

훔친 돈을 가지고 논산으로 향하던 절도범들은 형사의 전화를 받고 패닉에 빠졌다. A씨는 화들짝 놀라 훔친 성금을 B씨에게 맡기고 대전 유성에 있는 카페에 내려준 뒤 자신에게 전화를 건 형사를 만나러 계룡시로 갔다. A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형사가 추궁을 계속하자 끝내 자백했다. B씨는 체포 당시 커피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현금 6000만원이 든 성금 상자와 함께였다.

경찰이 확보한 A4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있었다. 전부 6016만 2310원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도주 과정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훔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0원 한 장도 안 썼다”고 말했다. 경찰은 회수한 성금을 전주시에 돌려줬다.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 소유권을 주민센터에 이전한 것으로 판단해서다.

전주시 노동송주민센터는 이 성금을 과거에 했던 것처럼 사회복지고동모금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관내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등 어려운 이웃 200명 가량을 추천하고, 초·중·고 학생 20명에게도 천사장학금(각 40만~100만원)을 주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수리점을 한 곳 더 열기 위해 기부금을 훔쳤다”

30일 0시에 논산에서 출발해 10시에 전주에서 기부금을 훔친 뒤 다시 논산으로 돌아간 절도범들은 이날 저녁 다시 전주로 갔다. 오후 7시 전북 전주 완상경찰소로 압송된 이들은 ‘왜 성금을 훔쳐갔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A씨는 경찰 진술에서 ”컴퓨터 수리점을 한 곳 더 열기 위해 기부금을 훔쳤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2명 이상이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했다”며 ”일반 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형이 있는데, 특수절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벌금형이 없어 처벌이 훨씬 무겁다”고 말했다.

절도범 검거에 결정적인 제보를 한 시민은 표창장을 받는다. 전북 전주완산경찰서는 31일 “노송동주민센터 주변 주민 제보로 쉽게 용의차량을 특정하고 추적에 나설 수 있었다. 차량번호가 적힌 메모를 준 주민에게 범인 검거 유공 표창을 줄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