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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5월 25일 14시 0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5월 25일 14시 08분 KST

재밌자고 하는 게임, 목숨 걸면 누군가에겐 지옥

최근 북미권에서는 게임업계의 크런치 모드가 중요한 이슈다.

huffpost

 

롤플레잉 게임의 명가인 바이오웨어사가 사운을 걸고 제작한 앤섬은 올해 가장 기대받는 게임 중 하나였다. 아이언맨이 착용하는 것 같은 기계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대 요소였다. 그러나 정작 게임이 발매된 뒤 몇몇 빛나는 부분이 있었는데도 다른 경쟁작들에 견줘서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향후 업데이트가 진행될 것이라곤 하지만 현재 이 게임의 전망은 어둡다.

그런 가운데 미국 게임매체 코타쿠에서 일종의 폭로 기사가 터져 나왔다. 기사는 앤섬이 제작되는 과정은 리더십이 없는 총체적 난관이었고, 회사는 임기응변에 급급했으며,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직원이 크런치(crunch·프로젝트 마감 등 중대한 상황을 맞이해 극심한 초과노동에 돌입하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말)에 시달리고, 신체적·정서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최근 북미권에서는 게임업계의 크런치 모드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게임계에는 오래전부터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야근, 과다 노동이 존재했고, 때때로 이는 게임 개발자들에게 명예처럼 여겨졌다. 회사는 예산과 출시 일정 등을 이유로 무리한 개발 스케줄을 잡고 직원들에게 크런치를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징계를 받거나 보복을 당한다. 그 결과 심하면 주 100시간이 넘어가는 산업혁명 초창기에나 어울릴 법한 장시간 노동이 이루어졌고, 이는 게임 개발자들의 건강과 삶을 망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바이오웨어뿐 아니라 명작 게임의 반열에 오른 위처 시리즈 제작사 시디 프로젝트 레드(CDPR)와 지티에이(GTA) 제작사 락스타게임즈 등을 비롯해서 수많은 게임 제작사들에서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사실 게임계의 크런치는 한국에서도 익숙하다. 한국의 게임 개발사 사옥들은 ‘판교의 등대’ ‘구로의 오징어배’ 같은 별칭으로 불리곤 했다. 주변 모든 회사의 직원들이 퇴근하고 불이 꺼진 시간에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는 경우가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에서는 게임업계 최초로 넥슨과 스마일게이트에 노조가 생겼고, 포괄임금제 및 탄력근무제 폐지 등을 목표로 회사와 단체협상을 벌였다.

게임업계의 야근이 더 만연할 수 있는 이유는 대부분의 게임 개발자가 게임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게임은 전형적으로 일과 취미 사이의 구분이 모호한 영역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역을 직업으로 갖게 된 이들에게는 “좋아서(원해서) 하는 일이니 감수하라”는 열정노동의 원리가 강력하게 작동하게 된다. 이들의 열정이 이들을 착취하는 명분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많은 게이머들이 더 많은 업데이트와 버그 및 밸런스 수정 등을 요구하고, 늦어질 때마다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곤 한다. 그리고 이런 게이머들의 요구는 크런치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게이머 입장에서는 자신이 구매한 게임이 더 많은 즐거움을 주길 바라는 마음의 발로이자 소비자의 권리라고 여기겠지만, 어떤 요구들은 과도하며 게임 제작자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침해한다. 심지어는 상업판매용도 아닌 모드(MOD)의 업데이트가 늦는다며 제작자에게 살해 협박을 하는 몰상식한 일도 벌어지곤 한다.

게임은 재미있자고 하는 일이고 누구도 여기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잊는 순간 게임은 누군가의 지옥이 된다.

* 한겨레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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