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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4월 18일 11시 00분 KST

고등학교에서 만난 연인과 19살 때 결혼했다. 후회하진 않지만 추천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한다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BAYLEA JONES
2011년에 기말고사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린 뒤

 

내 고향 빈튼에서는 누구나 고등학교 때 만난 연인과 결혼한다. 루이지애나 시골에 있는 작은 마을 빈튼의 인구는 3천 명이 겨우 넘는 정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학교에서 사귄 연인과 결혼하는 것은 기차가 매일 오후 3시에 사료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 만큼이나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는 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정말로 달랐다. 나는 동성애자였고, 그래서 세인트 조셉 가톨릭 교회나 빈튼 중학교에 앉아있을 때의 나는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또 우리 가족은 옆 마을에서 이사왔는데, 고립된 작은 동네들의 특성상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세대에 걸쳐 빈튼에 살아온 주민들은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절대 잊지 못하게 했다.

나는 여성적이지 않았고, 스스로 내 섹슈얼리티에 의문을 품기 전부터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모두가 의심하던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가까운 친구 몇 명들에게 털어놓았다. 소문이 퍼졌고, 나는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우팅 당했고, 끈질긴 괴롭힘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당시 나는 이 동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십대들이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원했을 뿐이었다. 데이트가 하고 싶었다. 첫 키스를 하며 두근거림을 느끼고, 학교 무도회에서 어색하게 춤을 추고, 복도에서 손을 잡고, 수업 시간에 사랑을 담은 쪽지를 주고받고 싶었다. 그런 경험을 어느 정도는 해보게 되었지만 조건이 따랐다. 내 친구들은 나를 자기 집에서 자고가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나와 스킨십을 하기도 했고, 내 전화를 차단했다가도 내게 키스 마크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아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연애에 가장 가까운 경험은 이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곳이 아니면 나와 키스하는 걸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만 만날 줄 알았다.

게다가 2,400킬로미터 떨어진 매사추세츠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은 불법이었다. 내가 여자친구를 만난다 해도, 우리가 함께 보낼 어떤 미래가 있단 말인가? 금요일 저녁 미식 축구 경기에서도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우리의 연애는 이 마을, 이 주, 미국의 98%, 세계 거의 전부에서 불법일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만 사랑해야 할 운명이었다.

9학년이 되자 내가 퀴어라는 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해 봄, 여름방학 직전에 이성애자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게 키스했다. 익숙한 패턴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내 숙제 대신 해주면 또 키스할게. 내가 레즈비언이라든가 하는 뜻은 아니야… 그런데 그녀는 내게 사귀겠느냐고 물었다.

브리트니와 나의 연애는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친구들은 내게는 “브리트니를 게이로 만들었다”고 위협했고, 브리트니에겐 내 감정을 가지고 논다고 비난했다. 가족들은 우리가 잠시 동성애를 하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교장은 우리가 홈커밍 댄스에 함께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일을 했다. 도망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2년 남겨둔 나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갔다. 브리트니의 가족은 다른 동네로 이사갔다. 우리는 2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다. 17세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고, 2학년 때는 4개월 동안 헤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우리는 함께 대학교로 탈출했다. 우리 가족에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젊을 때의 사랑은 정말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BAYLEA JONES
사귄 지 한 달 뒤. 커플이 된 후 처음 찍은 사진

2학년 때 우리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외국에 나갈 돈은 없어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인 매사추세츠로 갔다. 그때도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주는 몇 곳 뿐이었다. 우리의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서 매사추세츠에 있는 동안 결혼했다.

식은 조촐했다. 우리는 기말고사를 마친 다음 캠퍼스에서 나와 맞은편 공원으로 걸어갔다. 학교의 게이-이성애 연합 상담자가 주선했고, 한 학기 동안 우리가 사귄 친구 몇 명이 참석했다. 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나와 브리트니의 어머니는 스피커폰으로 식을 들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루이지애나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루이지애나는 우리의 결혼은 법적인 효력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19세였다.

사람들은 늘 우리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 물어보고 동화 같은 로맨스에 감탄한다. 우리가 많은 것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는 평범한 고등학교 연인 이야기에 맞아들어가지 않는다. 우리는 작은 동네에서 만난 퀴어 커플이고 벌써 12년 가까이 함께 했다. 동성결혼 합법화 이전에 결혼했고 우리의 고향인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미국 전체가 결혼 평등을 법제화하는 것을 4년 전에 지켜보았다. 내 생전에 그런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이건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19살 때 결혼했다! 15살 때부터 사귀었다. 우리는 인생 경험이 아주 적었다. 사귈 만한 사람이 100명 정도 있을까 하는 작은 동네 출신이었다. 머나먼 주로 도망가기로 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결혼한다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지금은 우리 둘 다 동의한다. 십대, 20대 초반 커플이 오래 가는 관계에 대한 조언을 물어볼 때면 우리는 헤어지고 인생을 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십대의 절반,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한 사람과 보냈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직장을 거치는 동안이었다. 브리트니와 나는 문자 그대로 같이 자라났다.

우리 경우는 일이 잘 풀렸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의 연인과 결혼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특히 아직 진보적이지 못한 고립된 곳에 산다면 더욱 그렇다. 특히 퀴어라면, 내가 있을 자리란 없고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느낀다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세상을 가질 자격이 있고 세상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날 방법이 없어서,또는 당신이 자란 곳을 사랑하고 다른 곳에서 사는 건 상상도 되지 않아서 계속 눌러앉아 산다면, 그것도 괜찮다. 내가 루이지애나주 빈튼에서 사랑을 찾는 게 가능했다면, 당신은 어디에서든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커밍아웃하고 아직도 고향에 사는 친구들이 많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BAYLEA JONES

나는 운이 좋았다. 살면서 중요한 일을 겪을 때마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옆에 있었다. 브리트니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내 고향을 이해하고, 브리트니의 가족은 지금도 우리 가족과 불과 몇 블럭 거리에 산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쉽게 보낼 수 있다. 브리트니는 내가 앳된 얼굴의 어린 게이에서 앳된 얼굴의 부치로 변해가는 걸 지켜보았다. 내가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여자아이와 결혼했다. 내 아내는 자기를 알아본다고 느끼게 해준 첫 번째 여자아이와 결혼했다. 아름다운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때의 연인과 결혼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의 연인과 결혼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 HuffPost USA의 I Married My High School Sweetheart, And I Don’t Recommend It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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