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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3월 11일 14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3월 11일 14시 58분 KST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이 필요한 이유

쿨한 관계가 주는 아쉬움이 있다.

Vladimir Godnik via Getty Images
huffpost

내겐 다섯명의 ‘30년 지기’가 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1학년 즈음부터 한동네에 살며 더없이 친하게 지냈던 관계니, 과연 길고도 끈끈한 인연이라고 할 만하다. 그 어린 시절부터 여러 대소사를 함께 겪은 후 우리는 30대 중반을 넘긴 아저씨가 됐다. 굳이 말한다면, 이들과 난 정말로 ‘가족과 같은’ 친구들이 아닐까 싶다.

그중엔 이미 결혼한 친구도 있고, 승승장구 사업을 이어가는 친구도, 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도 있다. 이제는 각 지방에 뿔뿔이 흩어져서 1년에 몇차례 만나기도 힘이 들지만, 한달에 한두번씩은 단톡방에서 꼬박꼬박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토록 ‘삶의 대부분을 함께한’ 친구들과 계속 인연을 이어간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꽤 유쾌하고 뿌듯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주위에 물어보면 분명히 흔치는 않은 경우이고, 또 살짝은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 게 사실이니까.

함께 늙어간다는 것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이들은 어떤 면에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고. 나의 유년기부터 가까이든 멀리서든 ‘나‘라는 인격의 형성을 쭉 지켜봐왔던 친구들이라, 이 친구들은 지금 내가 ‘사회적 가면’을 쓴 채 번듯하게 연기를 하는 ‘가면 뒤편의 모습’을 나 자신보다 더 잘 꿰뚫어 보고 있다. 다소 낯부끄럽기도 하고, 괜한 자존심(?) 때문에 이들 앞에서 굳이 입 밖으로 말은 안 꺼내도, 이처럼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어떤 존재들과 함께 늙어간다는 것이 괜히 고맙고 또 뭉클해지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시간의 누적’, 혹은 ‘우연히 맺어졌던 관계의 변치 않는 연속성’에 대한 경외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나의 밀폐된 자아가 나와 가까운 인연들 사이로 푸근하게 스며들며 확장되는 느낌일지도.(이런 말을 하면 그네는 하나같이 ‘저 인간 또 이상한 소리 하고 있군’이라고 콧방귀를 뀔 게 분명하지만.)
물론, 우리들의 저 순진무구했던 어린 시절은 지나갔다. 이들과 나는 사회경제적인 위치도, 삶의 관심사나 정치적 성향도, 또 각자의 주위를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도 많이 달라졌다. 이젠 저마다 이 그룹보다 더 자주 만나고 가까운 관계들이 생기기도 해서, 서로에게 아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일도 많진 않다. 매일같이 서로의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몇시간 동안 놀이터에서 죽을 치던 그 시절과 현재의 우리는 같지 않다. 우리는 과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어른이 된 것이다.
달라진 것은 하나 더 있다. 각자의 삶이 누적되어 단단하게 굳어진 고집불통의 성격이 그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오래도록 사귄 친구(혹은, 아주 가까운 인연)의 그 쇠가죽 같은 고집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이들 중 한 친구와 1시간가량 통화를 하면서 서로 “넌 내 말을 듣기는 듣는 거냐?”란 말을 수십번은 반복했다. 나는 전화를 하면서 꽉 막힌 가슴을 자주 두드렸는데, 아마 수화기 너머의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 친구들을 대할 때마다 내심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우정이란 무엇인가. 이들과의 저 오랜 관계는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질문에 관하여 가장 따뜻하고 낙관적인 묘사는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의 알렉산더 네하마스 교수의 언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정이라는 관념의 다소 불명확한 특성 때문에, 지금까지는 우정에 대한 문학적이고 학문적인 관심이 소홀했던 측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쌓이는 우정이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우정은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를 이루도록 길을 인도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철학 한입> 중에서

쿨한 관계가 주는 아쉬움

그렇지만 네하마스 교수의 이런 진단과는 다르게 우리들의 실제 삶 속에서 ‘우정’이나 ‘친구’의 가치는 옛날만 못한 게 분명한 것 같다. 점점 더 가파르고 팍팍하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깊고도 오랜’ 관계를 예전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억지로 그래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교우관계에서조차 나이와 학번 따위를 꼬박꼬박 따지던 위계적·수직적 문화, 그리고 혼자 있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며 ‘쟤는 친구도 없나?’라고 흘겨보는 집단주의적인 습속 등도 우리를 질리게 했던 측면이 있다.

더욱이 우정이란 가치를 순진하게 예찬할 수 없게 만드는 ‘어른의 사정’도 있다. 서로가 일구어 가는 삶의 처지가 달라지고 경제적인 격차가 점점 눈에 보이면서, 우리에겐 친구와의 만남이 그 자체로 부담과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젊은층 사이에서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직장에 자릴 잡은 뒤,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다 아예 친구와의 인연을 끊는 현상이 점점 늘어난다는 뉴스도 들린다.

그래서 요즘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며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려는 ‘우정’이라는 말 대신 ‘취향’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 취향 공동체. 좋아하는 것을 둘러싸고 가볍고 느슨하게 만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것 말이다. 나도 20대 이후 쉼 없이 독서와 영화감상 모임 등에 참여하며 멋진 인연을 만들어왔던지라, 이런 공동체에서 만난 관계들이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다만, 이러한 ‘쿨한 관계’, ‘쿨한 모임’들이 지나치게 권장되고 유행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과 결핍 같은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관계의 영역에 확실히 선을 긋고, 타인의 삶과 생각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다는 자세가 미리 전제된 관계는 무언가 약간은 떨떠름한 게 사실이다. 이런 식의 암묵적인 선 긋기, 혹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배려가 오히려 더 피로하고 갑갑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왜냐면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취향 이상의 무언가를 오래도록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는 때때로 자신과 다른 사람,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쓰디쓴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친구란 나의 나르시시즘을 제한해줄 수 있는 존재일 테니까. 그들은 나와 다르지만, 그처럼 다른 성향과 인격으로 오랫동안 나와 긴밀하게 부딪침으로써 나의 인격을 훨씬 더 여러 각도에서 가다듬어줄 수 있을 테니까.

바로 이 우정이라는 키워드에 천착했던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 한나 야나기하라가쓴 <리틀 라이프>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정, 교우 관계는 너무나 흔히 논리를 무시하고, 너무나 흔히 적임자들을 교묘히 피해 가고, 너무나 흔히 이상하고 못되고 특이하고 망가진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우정은 우정이 된다. 이 소설에서 줄곧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이런 우정의 역설에는 어떤 인생의 신비랄까, 인간관계의 깊숙한 묘미 같은 게 존재하는 것 같다.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들은 40여년에 걸친 시간을 함께 겪어냈다. 이들에 비해선 아직 10여년이 더 남아 있지만, 나도 내 오랜 친구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그들이 가끔은 자기 고집을 꺾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내 고집을 쉽사리 꺾을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글 · 산책맨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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