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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2월 27일 17시 34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02월 27일 17시 34분 KST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생기는 일

마음이 머무는 페이지를 만났습니다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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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음속에 별 하나쯤은 품고 산다. 어떤 사람에게 그 별은 가족이고 친구며 꿈이고, 신념이자 신앙이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한번쯤 가슴속 깊이 간직한 그 별이 추락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장 신뢰하던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 믿었던 친구의 배신, 그토록 원하던 꿈에 가 닿을 수 없게 만드는 현실, 자꾸만 자신의 신념과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 믿었던 신앙 안에서조차 사람은 단절을 경험하고 실망한다.

 

삶에 의미였던 마음의 별이 떨어지면 누구나 방향을 잃고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막막해진다. 아니, 걸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당장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인생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 질문과 만나게 된다.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오스트리아 작가 숀 탠의 《빨간 나무》는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별이 추락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감정을 잘 표현한 그림책이다. 이 책에 표현된 그림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삶의 어느 순간 누구나 한번쯤은 느꼈을 법한 감정과 만날 수 있다.

 

온갖 부정적인 단어가 가득 적힌 종이배를 탄 소녀가 짙은 회색빛 얼굴을 하고 잠잠히 웅크리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자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수많은 검은 잎 위에 밝게 빛나고 있는 하나뿐인 빨간 단풍잎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서사와 극도로 외롭고 우울한 분위기의 소녀가 등장하는 이 책은 표지부터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림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때문이다.

소녀는 넓은 초록 벌판에서 키 큰 나무 의자 위에 올라서서 메가폰을 입에 대고 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곤충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전하려고 했던 말은 하나하나 알파벳 낱자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초록 벌판은 황금벌판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녀는 혼자다.

하루가 시작되어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든 것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세상 밖으로 나가보지만 아무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 모두들 서로의 감정을 의식하지 않은 채 각자 자기 길을 갈 뿐이다. 급기야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머리에 잠수 헬멧을 쓴 소녀는 병 속에 자신을 가두고 운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이 앉아 있는 소녀의 허리춤까지 차오른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울어봐도 ‘세상은 귀머거리 기계’처럼, ‘마음도 머리도 없는 기계’처럼 바쁘게 움직이기만 한다.

소녀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시간 속에서 묵묵히 기다린다. 게다가 이 외롭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폭풍우를 만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운명 앞에서 소녀는 생각한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디에 있지?’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폭풍우를 만났을 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소녀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밝고 빛나는 빨간 나무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녀는 웃는다.

 

오랜 시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온 사람은 절망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괜찮아, 잘될 거야’ ‘아자, 다시 해보는 거야’ 등 자기최면의 말을 하며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버리고 느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에는 에너지가 있다. 특히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순간에 올라오는 외로움, 불안, 두려움, 근심, 우울, 의심 등 불편한 감정은 가까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도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쁜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림책 《빨간 나무》는 그동안 느끼기 두려워서 외면했던 감정과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지난 시간 마음 깊은 곳에 얼려두었던 감정들과 만날 수 있다. 내 안의 불편한 감정은 스스로 용기를 갖고 제대로 느끼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 자기 자신이 두렵다는 이들을 만난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 지나치게 친절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이 웃으며 굽실거리는 몸짓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이들과 조금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지난 시간 돌보지 못했던 감정을 쏟아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 자신의 감정보다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타인에게 원만한 사람으로 보일 만한 감정만 표현하며 산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하나의 감정을 선택해서 가면처럼 쓰고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감정은 점점 굳어진다. 얼핏 보면 친절한 듯하지만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인간관계 안에서 진실한 감정을 주고받을 때, 보다 친밀한 관계까지 발전하게 된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조차 온전히 느끼고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기에 관계 속에서 사랑과 신뢰를 경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다른 이들의 친절과 사랑도 온전히 믿지 못한다. 믿는 척, 친절한 척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빨간 나무》의 소녀처럼 공허하고 외롭고 우울한 감정 속에서 급기야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느낀 그 순간,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라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느끼고 답하기 시작할 때,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음과모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할 때 뛸 듯이 기쁜가?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하는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일은 바로 이렇게 쉬운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하며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할 때 알게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여기에서 왜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세상이 무너질 듯 커다란 절망 속에 있을지라도 단 하나, 여전히 나를 살리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빨간 나무》의 소녀가 그랬듯이.

세상이 아무리 차갑게 느껴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내가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빨간 나무가 있다는 걸 기억하자.

* 에세이 ‘마음이 머무는 페이지를 만났습니다(꼼지락)’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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