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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3일 11시 5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11월 23일 11시 53분 KST

이주와 난민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Adrees Latif / Reuters
huffpost

미국 국경으로 향하는 온두라스 이민자들의 행렬이 속속 멕시코에 도착하고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은 아프리카 서북단 스페인령 세우타에 진입했다 추방되었다. 온두라스 이민자나 아프리카 난민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집단 이동은 우리에게 어떤 지정학적 사실을 암시한다.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저서 <자본의 세계 내부>(World Interior of Capital)에서 오늘날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우리 삶의 조건이 전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따라 결정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 징후를 가장 먼저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제1회 런던 세계박람회를 위해 1851년 건축된 수정궁이다. 수정궁은 주철 기둥과 유리로만 지어져 외부에서 내부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건물이었지만, 경계가 투명한 건물이라고 해서 초대받지 않은 이들이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수정궁의 구조는 세계화가 지닌 배타성을 세계 내부가 구성되고 확장되는 방식으로 가시화한다. 오늘날 세계 내부에는 세계화 과정에서 승리한 15억 인구가 거주하고 있지만, 그 바깥에는 그 세 배에 달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결국 “자본의 세계 내부는 확 트인 하늘 아래 모든 이에게 개방된 광장이 아니라, 한때 외부였던 공간을 내부로 끌어들인 유리건물에 불과하다.” 자본의 과잉 위에 만들어진 이 세계 내부는 오늘날 모든 것을 결정한다.

슬로터다이크가 정확히 지적하듯 자본주의 세계화는 개방과 정복뿐 아니라, 내부로 외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자기봉쇄도 의미한다. 세계화의 이 두 가지 측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이유는 자본주의가 계급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보호되어야 할 내부인과 보호받지 않아도 되는 외부인을 성공적으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자와 난민의 무리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서야, 세계 내부에 있는 이들, 그러니까 우리들은 저 바깥에 폭력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잠깐이나마 다시 기억해낸다. 우리에게 그 폭력적 세계는 뉴스에서나 볼 수 있는 외딴 세계이고, 우리의 현실에 속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침해하는 세계다.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임무는 저 경계 바깥의 현실을 인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럼 이제 레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무엇을 할 것인가.

첫번째 해법은 외부에 있는 이들이 내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모두 걸어 잠그는 것이다. 바깥은 난장판이니 벽과 문을 모조리 봉쇄하여 우리를 보호하자는 태도다. 지금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문명의 충돌’을 대신하는 것은 소위 평화로운 ‘문명의 공존’ 또는 ‘삶의 방식의 공존’이다. 서구인들은 이제 제3세계에서 여성에게 강제결혼을 강요하든, 동성애혐오를 일삼든, 성폭행 피해자 여성에게 밤늦게 혼자 돌아다녔다고 책임을 전가하든, 그것이 다른 나라 이야기고, 그 나라가 세계 시장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기만 하다면 전혀 개의치 않는다.

지금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질서는 후쿠야마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정치적·종교적 삶의 방식이 소위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며, 이 공존 뒤에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매끄럽게 굴러가고 있다. 외설적이게도 이 공존의 과정은 마치 반식민주의적 투쟁의 성취인 것처럼 포장된다. 서구는 이제 과거와 달리 제3세계에 서구의 기준을 강요하지 않고, 삶의 방식을 모두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가베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짐바브웨는 짐바브웨 우선주의를, 인도는 인도 우선주의를, 북한은 북한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뿐이다. 세계 최초의 자본주의 제국인 영국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다. 영국은 인도의 민족 공동체들과 종교 공동체들이 저마다 각자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통제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영국 지배하에서도 남편이 사망하면 장례식 때 그의 아내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이 ‘관습’을 야만적 악습으로 보고 근절하려는 이들도 있었고 힌두교 전통으로 보고 지키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영국은 이를 묵인하고 관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제국주의 영국에는 인도가 경제적으로 제국의 일부이기만 하면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관용’이 오늘날 부활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인류해방이라는 긍정적 비전을 이데올로기적 꿈의 형태로조차 제공하지 못한다. 후쿠야마식의 자유민주주의적 보편주의가 그 자체에 내재한 한계와 모순 때문에 실패한 이후, 그 실패의 증상은 포퓰리즘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그것이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해법은 새로운 보편주의다. 새로운 보편주의만이 생태학적 위협에서 난민 위기에 이르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해법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통해 경계 바깥에 있는 이들을 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법을 대표하는 이들로 빌 게이츠나 조지 소로스처럼 사회적 책임을 지려는 기업인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난민에게 국경을 개방하고, 난민을 자국민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해법이 대증요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증요법은 환자의 증상을 완화해주지만,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의 해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경계 바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경계 안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초점을 이 지구의 비참한 이들로부터 비참한 지구 자체로 돌릴 필요가 있다.

세번째 해법은 우리 모두 용기를 내어 급진적인 변화를 구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자 할 때만 가능해진다. ‘인류세’(Anthropocene)는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부터를 별개의 시대로 분리한 지질시대 개념이다. 인류세에 접어든 지구는 인류의 생산활동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우리의 생산활동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을 더 이상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 바로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지구라는 작은 행성 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온 것이다.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급진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로,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야생동물 길들이기에 비유한다.

각 국가는 공권력의 이름으로 그 성원들을 훈육하고 교육함으로써 내부적 평화를 유지하지만, 국가 간에는 언제나 잠재적인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평시라 하더라도 실은 일시적인 휴전 상태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국가의 윤리 전체는 개인이 자신이 속한 국가를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소위 영웅주의라는 숭고한 행위를 발휘할 때 고조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문명 그 자체를 문명화하는 작업을, 또 전체 인류 공동체에 보편적 연대와 협력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우리의 긴급한 임무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구상하는 것은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혁명적인 변화 없이 인류가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이야말로 허무맹랑한 공상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