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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9월 27일 16시 53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9월 27일 17시 05분 KST

아이폰은 멈춰도 애플 스토어는 달린다

애플의 혁신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애플 스토어에서.

Apple
애플 스토어 2.0이 시작된 Apple Union Square.
huffpost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 애플(Apple)이 신제품을 내놨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애플의 UFO 신사옥 내 ‘스티브 잡스 극장’에서 지난 9월 12일(현지시간) 열린 공개 행사에서 신형 아이폰 XS와 XS 맥스(Max), XR 3종과 애플워치 4시리즈를 발표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자잘한 진화는 있을지언정 애플의 최대 장기이자 정체성이던 ‘파괴적 혁신’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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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 공개한 신제품, 아이폰 XS와 아이폰 XS 맥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이자 쇠락해진 기업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은 CEO였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죽음을 기점으로 팀 쿡(Tim Cook)이 새로운 리더십으로 공백을 메워가면서 애플이란 기업의 태도가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기정사실이다. 특히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손안에 잡히는 물건이 잡스의 완벽주의와 빨간 펜을 벗어나면서 우왕자왕 방향타를 잃어버렸다. 덕분에 애플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예찬하던 충성 세력 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안티로 돌변해 신제품 공개 행사마다 싸늘한 반응을 보이며 실시간 악플을 달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잡스의 또 다른 유산인 애플 스토어에 대한 평가는 놀랍도록 잠잠하다.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세워지는 애플 스토어는 애플의 디자인 철학을 공간에서 구현하는 구심점 역할을 맡는, 오프라인 전략의 핵심 요소다. 애플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면서 애플 스토어 역시 그 노선이 변했는데 가뜩이나 꼼꼼하고 불같은 열정으로 명성이 자자한 마니아들이 회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상황에서 무려 ‘무플’이라니.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데, 설마 아예 포기해버린 것일까?

아마 공간과 건축이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인지라 사람들의 안줏거리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정말 까닭이 그것뿐인가? 잡스 이후 망조를 타는 제품과는 달리, 애플 스토어는 연이은 호평을 받고 있다. 이 놀라운 현상의 저변에는 본사 인하우스 디자인팀과 유통팀, 외부의 건축 사무소가 힘을 합쳐 새롭게 디자인을 혁신하는 노력이 존재한다.

잡스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결벽증이 느껴질 정도로 투명한 유리 큐브 혹은 원기둥 모양의 플래그십 매장을 통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던 애플 스토어는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그의 완벽주의와 참견이 그대로 반영된, 잡스 뇌에 떠다니는 아이디어와 이미지의 재현물이었다. 하지만 잡스가 세상을 떠난 후 상황이 달라졌다. 결정적인 기점을 따지자면 아마 2014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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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Fifth 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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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Pudong

먼저 전 세계 애플 스토어를 실제 건축물로 구현하는 역할을 맡던 건축사무소가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뉴욕 5번가의 역사적인 유리 큐브와 상하이 푸동의 유리 실린더를 만든 ‘보린 크윈스키 잭슨(Bohlin Cywinsky Jackson)’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승자는 바로 도넛 모양의 신사옥인 ‘애플 파크(Apple Park)’을 만든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Foster + Partners)’다. 영국의 기사 작위를 수훈한 거장,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이끄는 이 건축사무소는 하이 테크놀로지를 적절히 활용해 미래적이고 현대적인 느낌의 건축물을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곳이다.

Foster + Partners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 남작

기업 내부적으로는 공석이던 유통 부문 수석 부사장에 안젤라 아렌트(Angela Ahrendts)가 깜짝 발탁되며 이목을 끌었다. 영국의 유서 깊은 럭셔리 패션 하우스인 버버리의 CEO를 맡아 디지털 경영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며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자유롭게 오가는 파격적인 행보로 쇠락하던 버버리의 매출을 급상승시킨 그녀는 현재 시가총액 1조 달러에 진입한 전무후무한 초대형 기업에서 여성으로서는 가장 높은 위치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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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버리의 CEO 자리를 박차고 애플로 온 안젤라 아렌트

그녀가 맡은 역할은 애플 스토어와 엮인 오프라인 경험 디자인을 진화시키는 일이다. 그 결실은 2016년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매장 리뉴얼이 촉발한 애플 스토어 2.0 버전의 등장, 작년 5월 론칭한 크리에이티브 교육 프로그램인 ‘투데이 앳 애플(Today At Apple)’,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한 ‘타운 스퀘어(Town Square)’라는 새로운 스토어 개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애플의 디자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애플 최고 디자인 책임자(CDO)가 이끄는 인하우스 디자인팀은 살아생전 애플 스토어의 공간 디자인 특허까지 등록하며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오롯이 고집했던 잡스와는 사뭇 다르게 유연한 협력 체제를 허용하며 애플 스토어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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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디자인 혁신에서 빠질 수 없는 조너선 아이브

애플의 주력 제품이 명확히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양새라면 유독 애플 스토어만큼은 자신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 안젤라 아렌트, 조너선 아이브란 세 존재가 서로 힘을 합쳐 힘차게 나아가는 장면은 당당한 삼두마차를 연상시킬 정도다.

이런 애플 스토어 디자인의 진화 양상은 작년과 올해 유독 두드러진다. 아시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도시(the greenest city)라는 싱가포르에 처음 진출한 애플 스토어는 입구에 성년의 나무를 심고, 매장 안에는 나무가 뿌리내린 화분을 데려왔다.(애플 스토어 2.0의 특징이기도 하다.) 밀라노에 오픈한 애플 스토어는 전통적인 이탈리안 광장인 피아짜를 마련하고 유리 벽으로 수직 폭포를 배치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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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Orchard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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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Piazza Liberty

마카오에 개장한 애플 스토어는 투명한 유리 벽 혹은 회색 모노톤의 철로 마감하던 매장 파사드에 석재와 유리를 결합해 불투명한 느낌을 부여했다. 극도의 단순함을 추구하던 잡스가 무덤에서 다시 기어올라와서 이렇게 외칠 느낌이다. “애매한 건 죄악이야!!” 이에 비하면 1층 천장을 네모지게 뚫어 중정을 만든 후 2층 천장에 닿을락 말락 높이의 긴 대나무를 심은 건 그리 파격도 아닐 테다. (아, 그런데 이것도 놀랄 일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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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Cotai Cent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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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Cotai Central

가장 최근인 지난 8월 24일 정식 오픈한 일본의 문화 도시, 교토의 애플 스토어는 이런 디자인 진화가 극에 달한 느낌이다. 교토의 중심가이자 수많은 전통 건물로 둘러싸인 신조도리에 자리 잡은 애플 스토어는 마카오 매장처럼 불투명한 파사드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건 따로 있다. 일본의 전통적인 등에서 영감을 받아 특유의 격자 비례를 외관에 적용했고 그 마감재로는 종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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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Kyoto

애플이 종교처럼 받들던 플랫한 벽면이 아니라 불룩이는 부피감이 연상되는 불투명한 종이 파사드라니. 그라데이션 효과가 여실히 보이는 정면의 모습을 애플 스토어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 5번가 매장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느껴진다. 이런 파격적인 시도가 과연 일본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도, 교토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특수한 예에 속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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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스토어 교토 개장을 축하하는 그래픽 디자인. 일본 전통미를 그대로 살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매장들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염두에 둘 때, 이제 애플은 로컬의 특징과 맥락을 적극적으로 공간에 접목하는 방식이 애플 스토어의 새로운 디자인 가이드라인이란 사실을 조용히 천명하는 중이다.

날카로울 정도로 세련된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뽐내던 잡스의 ‘디자인’은 이제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대신 장소와 도시를 이해하고 지역성과 연계한 보다 더 조화로운 ‘건축’이 생성되고 있다. 애플 스토어 2.0을 적용한 새로운 ‘가게’에서 사람들은 진보된 경험 디자인을 통해 애플의 브랜드와 제품을 접한다. 인하우스 팀이 적절히 톤앤매너를 조절한 덕에 마치 파도의 리듬을 타듯 세계 곳곳에 자연스레 증식하는 애플 스토어의 모습을 지켜보면 오랜만에 애플이란 이름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이 되살아난다.

애플의 디자인이 잡스 사후 퇴보했다고 믿는 사람은 손 위의 제품만 골똘히 노려보지 말고 시야를 세계로 넓히길 권한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지구 어딘가에서 지금도 애플 스토어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