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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시간’을 기억하며

의견이 다른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늘 온화한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연예인의 정치 참여는 늘 뜨거운 감자였다. 집권 여당과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문화예술인들이 체계적인 불이익을 당했던 지난 몇년간의 경험은 끔찍하지만, 행정부 차원에서 내려오는 탄압이 아니더라도 한국인들은 늘 연예인의 정치 참여를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떤 이들은 연예인들이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한다고 얕잡아보고, 또 어떤 이들은 연예인들이 의식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정치 참여를 이용한다고 넘겨짚기도 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연예인인데도 의식 있네”라는 식으로 칭찬하면서 은연중에 “연예인들은 별생각이 없을 것 같은데 저 사람은 다른가 보다”라는 투로 연예인 전반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고,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연예인을 향해서는 “콩고물 떨어지는 거 받아먹으려고 저렇게 선동질을 한다”는 식으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덩그러니 숫자로만 남은 4·3 아닌가

ⓒ한겨레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 제주도청은 4·3 70주년을 맞이해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에 가수 이효리와 루시드폴, 이은미를 초청했다. 그런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이효리의 팬카페에는 본인이 유족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남긴 글이 올라왔다. “4·3 추념식에 사회를 본다거나 내레이션을 할 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참 어쩔 수 없는 연예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장 철회하시고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4·3은 제주도민의 아픔’이라고 감히 입으로 말을 하기도 가슴 아픈 사건입니다. 희생자와 유족들이 경건히 조용히 치르기를 원하는 자리입니다. 유족의 한 사람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몸이 떨리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효리에게 “4·3 추념식은 그냥 행사가 아니”며 “굳이 내레이션이나 사회를 진행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인기있는 연예인”이니 정중히 거절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 글은 그리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제주4·3의 비극을 널리 알리고 추모의 뜻을 전하기 위한 좋은 뜻인데 왜 그러냐”는 반응을 보였고, 제주에 와서 많은 것을 받았으니 자신도 제주에 무언가 보답하고 싶다던 이효리의 과거 발언들이 기사화되기도 했다. 이효리와 소속사는 말을 아꼈고 예정대로 추념식에 참석한 이효리는 이종형의 ‘바람의 집’, 이산하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 김수열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를 차분히 낭독했다.

 

예정대로 4·3 추념식에 참석한 이효리는 이종형의 ‘바람의 집’, 이산하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 김수열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를 차분히 낭독했다.
예정대로 4·3 추념식에 참석한 이효리는 이종형의 ‘바람의 집’, 이산하의 ‘생은 아물지 않는다’, 김수열의 ‘나무 한 그루 심고 싶다’를 차분히 낭독했다. ⓒ청와대 효자동사진관

이효리의 추념식 참석은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2017년 현충일 추념식에 배우 이보영이 참석해 추모시로 유연숙 작가의 시 ‘넋은 별이 되고’를 낭독해 화제를 모았던 것처럼 국가 단위의 추모 행사에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해 더 많은 이들에게 추모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게다가 70주년을 맞이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제주4·3을 알리고 그 완전한 해결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으니, 제주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을 지닌 슈퍼스타가 제 유명세를 제주4·3의 비극을 알리는 데 활용하는 건 공공에 대한 봉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이효리의 4·3 추념식 참석을 응원하고 찬사를 보내는 동안 팬카페에 글을 올린 사람이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은 은근슬쩍 은폐됐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이효리를 초청한 것에 대해 “여러 관계자의 협의를 거쳐 신중히 선택”한 것이라 말했지만 4·3 유족들에게 연예인 초청의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충분하다 말하긴 어려웠으리라. 물론 희생자 수가 3만명에서 최대 8만명까지 추정되는 만큼 제주도민의 상당수가 직간접적인 유족인 셈이고 이들 전원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하는 건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은 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이념적 공격의 대상이 되어온 탓에 아직까지 그 성격 규정조차 국민적 합의를 구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숫자로만 불리고 있는 제주4·3 아닌가. 대통령이 직접 “4·3의 진실은 어느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고 선언했음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시민분향소를 파괴하는 테러를 자행하지 않는가? 상황이 이러니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혹시 덧날까 두려워 예민하게 반응하는 목소리도 나올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여전히 4·3 추념식을 지극히 방어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오해가 있거나 견해가 다르다면 정중하게 입장을 설명하고 재차 이해와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었다. “화려한 무대나 활기찬 진행이 아니라 차분하고 경건한 추모의 시간이 될 것이며, 이는 그간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제주4·3의 비극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모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일”이라고 풀어서 설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팬카페에 글을 쓴 사람이 진짜 유족인지 어떻게 아느냐”며 진짜 유족인지 증명해 보라는 식의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고, “다른 유족들 다 별 불만 없는 것 같던데 혼자 저런다”는 언사들이 인터넷 공간을 위태롭게 날아다녔다. 심지어 제주도청 관계자는 인터넷매체 OSEN과의 통화에서 글쓴이를 설득하는 대신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하며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글쓴이가 정말 유족이었다면 제주도청 관계자는 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위로받는 자리가 혹시라도 변질되는 건 아닐까 우려한 유족에게 “명백한 명예훼손”이라고 윽박지른 꼴이 되는 것이다. 글쓴이가 유족이 아닐 가능성을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지난 몇년간 온라인에서 반복해 등장한 “당신이 정말 피해자인지 주작(‘조작’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인지 알 게 뭐냐. 증거를 대라”는 말들을 떠올렸다.

고작 이견을 틀어막는 것이라면…

의견이 다른 상대와의 의사소통이 늘 온화한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모든 발언이 다 동등한 무게로 다뤄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색깔론을 동원해 제주4·3을 공격하고 유족들을 모독하며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한다는 핑계로 민간인에 대한 국가폭력을 긍정하는 일각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없는 망언이다. 건강한 공론의 장이라면 이런 발언들은 진지하게 상대하는 대신 최대한 빨리 걸러낼 필요가 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만났을 때 최대한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민주사회의 의사소통 원칙이다. 남들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배척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팬카페에 올라온 글을 대하는 과정에서 해명과 설득의 목소리보다는 상대에게 발언할 자격이 있는지 입증할 것을 요구하거나 상대의 주장을 명예훼손이라고 일축하는 공격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효리가 제주4·3의 비극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탠 것은 좋은 일이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예인에게도 정파를 막론하고 제 정치적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어떤 이유로도 부정되거나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효리의 4·3 추념식 참석이 많은 이들의 응원과 찬사 속에 치러진 건 연예인의 정치 참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많이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택한 방식이 고작 이견을 틀어막고 공격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얻어낸 정치 참여의 권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대화와 설득 대신 공격을 택하는 사회에 다양한 목소리가 살아 숨쉴 리 없다. 우리 중 대부분이 지난 세월 광장에 나와 싸운 건, 이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탄압받는 일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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