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아이스맨' 정현의 심리상담사 "정현 멘탈은 4강 이상"

  • 김원철
  • 입력 2018.01.29 12:06
  • 수정 2018.01.29 12:15

정현을 비롯해 여러 선수들의 심리를 상담하며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데 숨은 공을 세운 박성희 박사. 극구 인터뷰를 사양하던 그를 어렵게 만났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기 전, 언젠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희 박사(스포츠심리학 전공)는 애초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을 극구 거절했다. “정현 선수와 관련된 일을 지금 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박성희 박사를 소개한 체육계 관계자는 “지금의 정현을 만드는 데 박성희 박사의 공이 컸다. 국내에선 아직 낯설지만 선수들이 세계 톱 클래스에 오르느냐 못 오르느냐의 관건은 결국 멘털이다. ‘팀 정현’의 성취에 그의 공이 반드시 기록돼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고 서울 잠실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가던 날은, 21세기 들어 가장 체감기온이 낮은 날이었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강력함, 멘털(정신력)이란 과연 뭘까.

1월22일 ‘2018 오스트레일리아오픈테니스대회’에 출전한 정현(22)은 전세계 랭킹 1위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14위)를 8강전에서 꺾었다. 온 국민이 놀랐다. 한 스포츠 커뮤니티에는 “허재가 마이클 조던, 고종수가 지네딘 지단을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반응까지 올라왔다. 정작 정현은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모습이었다(그의 별명은 ‘아이스맨’이다). 그는 경기 뒤 공식 기자회견에서 ‘4강에 오른 심정’을 묻는 기자들에게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 별다른 것은 없다. 샤워하고 찬물에 들어갔다 와 추운 느낌이다. 담담하다”고 말했다. ‘조선 청년’이 거둔 뜻밖의 승리가 얼얼하던 때, 한 방 맞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호들갑 떠는 당신들만 몰랐을 뿐, 나는 원래 이 정도 레벨의 선수라고!

그 인터뷰가 생경했다고 말하자 박성희 박사는 “정현은 이미 지난해 라파엘 나달(스페인·1위)과 시합했고, 세계 랭킹 톱10 선수들과 붙으며 계속 투어를 뛰어왔다. 이제 얼마만큼 오르고 누구랑 붙는 것에 감격할 필요 없이 더 위를 보고 달리며 즐겁게 도전하는 수준에 왔다”고 말했다. 삼일공고 테니스 감독이기도 했던 정현 선수의 아버지가 꼽은 ‘팀 정현’의 숨은 공로자 박성희 박사를 로저 페더러(스위스·2위)와의 경기를 앞두던 1월26일 오전에 만났다.

“언젠가 메이저 대회 우승할 것”

정현 선수와 연락은 했나.

마지막 통화는 8강전 끝나고 했다. 메시지는 계속 주고받았다. 엄청나게 많은 메시지와 연락을 받을 텐데, 굳이 나한테까지 연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웃음)

한국 선수가 테니스 메이저 대회 4강에 갔다는 것에 대한 감격이 신드롬 수준이다.

일본 여자 선수들이 4강에 간 적 있고, 남자 선수는 일본 선수가 결승에 오른 적이 있다(일본 선수 니시코리 게이는 2014년 US오픈 결승에 올랐다). 현이가 대단하다(박성희 박사는 정현 선수를 ‘현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메이저 대회 우승도 하겠지만, 톱 선수들을 이기고 올라간 지금도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예상했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기 전, 언젠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얘기는 서로 많이 했다. 그동안 노력해온 너를 믿으라고.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이번 대회에서 엄청난 일을 낼 줄은 몰랐다. 그래서 믿는다. 지금도 대단하지만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정현 선수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의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멘털코치’라고 하던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멘털코치’라는 표현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선수마다 다른 심리를 상담한다. 선수들이 다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선수 개개인과 한 심리상담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원칙은 ‘시합 중에는, 잘할 때는, 특별히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상담이 필요할 때는 훈련할 때다. 어떤 레벨의 선수라도 훈련할 때는 너무 힘들다. 인내하고 참아야 하고,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동기부여를 하고 다른 모멘텀(동력)을 만든다.

멘털이 중요한 건, 시합 때 아닌가.

준비가 잘돼 있고 훈련이 충분하면 시합은 알아서 굴러가는 것이다. 스포츠심리는 결국 인간의 고민에 대한 것이다. 그동안 운동선수에게 이런 부분에 대한 도움이 없었다. 현장 코치들은 선수들을 훈련하고 놔두면 알아서 큰다고 생각한다. 정작 선수들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주니어를 지나 성인 무대에서 자리를 잡느냐 마느냐는, 바뀐 환경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응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다. 좁은 인간관계에서 살다보니 (문제가 있어도) 얘기할 데도 없다. 주니어 때 현이 레벨의 선수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왜 성인이 되어 현이만큼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까. 다 재능이 엄청난 선수들이었는데. 노력, 훈련, 재능만으론 안 되는 거다. 선수가 자기와 싸우는 시간은 훈련 때, 그리고 일상을 살면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현 선수가 시합 전후로 보이는 퍼포먼스는 굉장히 잘 성장한, 유쾌한 청년의 느낌이다.

시합에 맞춰 잘 준비돼 있다. 그 자신감이 현이에게 있다. 미디어에 굉장히 익숙한 세대고, 과묵하지만 자기표현에도 능한 스타일이다. 시합 가기 전에도 ‘그냥 가서 해, 잘할 수 있잖아’라고 말해줬다.

“패배의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스포츠심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준비 정도에 대한 확신인가.

현이도 슬럼프를 겪었고, 바닥까지 내려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올라왔다. 2016년 2월부터 현이랑 일했는데, 그때가 딱 그랬다. 세계 랭킹 51위까지는 단숨에 올라왔는데, 그 레벨에서 살아남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늘 분석당했고,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선수들과 맞서야 했다. 현이는 백핸드는 톱 레벨인데, 포핸드에서 실수가 많았다. 그게 해결이 안 되니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현이는 리우올림픽도 안 가고, 윔블던도 포기하고 여름 내내 몇 개월 동안 훈련만 했다. 그때 기술적으로도 좋아졌겠지만 멘털에서도 스스로 자신감의 근거를 찾아낸 것 같다.

어느 정도 레벨에 올라간 선수들에게 어떤 말을 많이 해주나.

슬럼프는 누구나 겪는다. 올라갈 땐 승승장구하지만 누구나 꺾인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가 그 레벨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하고 내려오는 선수를 많이 봤다. 패배의 순간에 받는 좌절감과 스트레스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더 많은 노력을 하거나, 그냥 쉬는 것도 방법이다. 우선은 자신을 믿으라 한다. 확신하라고.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정도 자리에 오른 선수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함께 견디고 버티며 다시 모멘텀을 찾게 도와야 한다.

좀 추상적인데, 구체적 방법이 뭔가.

어느 정도 레벨이 된 선수들에게는 직접 묻는다. ‘너는 스스로 그 정도 레벨의 선수라고 생각하느냐’고. 낮은 단계에서 올라가는 건 비교적 쉽다. 하지만 높은 단계를 유지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테니스만 놓고 보더라도 프로 투어는 정글이다. 자신감을 갖도록, 자신감의 근거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계속 유도한다. 그렇게 되면 패배하더라도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더라도 ‘다음엔 더 강하게 붙자’고 긍정적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낮은 레벨의 선수들에게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도록 해본다. 언젠가 우승도 할 거란 생각은 다 하니까. 그러고는 ‘설명해봐라, 나를 설득해봐라’고 한다. 그런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거쳐 동기부여를 해나간다. 어떤 선수들은 계획적으로 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고, 어떤 선수들은 하나의 한계만 설정해 깨나가며 성취감을 갖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현이 같은 경우는 후자였다. 당장에 보이는 한계를 넘는 것. 올해 초 현이의 목표는 ‘우승을 한다’ 이런 것이 아니라, ‘본인의 최고 랭킹을 경신한다’였다. 현이는 늘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사님도 테니스 국가대표를 하고 세계 랭킹 50위권에 오를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는데, 현장 지도자가 아닌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이유는 뭔가.

18살에 프로로 전향해 26살 때까지 뛰었다. 주니어에서는 난다 긴다 했는데, 프로에 데뷔해서는 5~6개 대회에서 전부 1회전 탈락했다. 충격받았고, 뭔가 인생 전체가 얻어맞은 듯했다. 그 해결책을 찾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패배와 좌절이 필연적인데, 그게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시에는 선수는 물론 코치들도 전혀 몰랐다. 코치들은 ‘다음엔 잘하자’ 정도 말하고 위로해주는 게 전부였다. 부상으로 빨리 은퇴하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들여다보니 스포츠심리학에 그 대답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동 완성’될 감정 조절 능력

박성희 박사는 선수가 홀로 들어서는 코트 위에서는 모든 일이 자동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선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동 반응할 수 있도록, 반복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그 기능적 측면에서 정현은 이미 세계 톱 레벨에 올라섰다. 박성희 박사는 이미 조코비치를 넘어선 정현이 페더러, 그리고 나달을 넘어설 수 있는지는 “코트 위에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그 조절 능력은 이제부터 정현의 몸에 쌓일 경험과 숙련으로 언젠가 ‘자동 완성’될 것이다.

정현은 코치들이 “쉬라고 해도 고집을 부리고 안 쉬던 선수”였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 오늘의 정현을 만들었다. 정현이 뛰는 레벨에서는 누가 누구에게도 질 수 있다. 그래서 이제 정현은 누구도 이길 수 있는 선수다. 정현이 어디까지 오르고, 얼마나 더 비약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다행스러운 점은 정현이 “좋은 시기에 좋은 코치들을 만나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박성희 박사는 “힘든 시기를 극복하는 것을 지켜봐왔고, 그 힘든 시기에 함께 해결책을 찾고 견뎠던 처지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낸 그의 삶이 스포츠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한국 스포츠에 떨어진 기적 같은 축복이던 박태환(1989년생)과 김연아(1990년생)의 시대가 물러가자마자, 이제 준비된 톱 클래스 정현(1996년생)의 시대가 오고 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테니스 #정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