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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축산물 10만원' 청탁금지법 상한선 올린 이유 물어봤더니

  • 김원철
  • 입력 2017.12.12 11:11
  • 수정 2017.12.12 12:40

이홍기 한국농축산연합회 상임대표가 2016년 7월 28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김영란법’에 대한 합헌 결정이 내려진 뒤 20만원짜리 한우 선물세트에 5만원어치의 고기만 담아 기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3·5·10(식사·선물·경조사) 규정을 풀고 법을 고칠 거면 차라리 법을 폐지하는 게 낫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화훼 등 농업 쪽에도 중·장기적으로는 부정적 영향이 없다

-박은정 현 국민권익위원장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의 주무부서인 국민권익위 전·현직 위원장은 입을 모아 김영란법 개정에 반대했습니다. 현직인 박은정 위원장 역시 지난달 말까지 개정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여론도 국민의 67%가 현행 3·5·10 규정이 적정하거나 오히려 너무 높다고 답했습니다. (▶관련 기사: 국민 대다수 찬성하는데…‘3·510’ 김영란법 누가 흔드나) 그럼에도 12일 김영란법이 개정됐습니다. 김영란법이 허용하는 선물의 상한액을 농축산물에 한해 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올리고, 반면 경조사비는 10만원에서 5만원으로 낮추는 것이 핵심입니다.

11일 오후 김영란법 시행령 개정을 위해 전원위원회 참석한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

■ 농축산인 보호 명목으로 김영란법 개정

결국 농축산물 선물 상한액은 10만원으로 올라갔습니다. 동원된 명분은 ‘농축산인 보호’였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총대를 멨지요. 취임 초부터 농축산물에 한해 선물 상한액을 올리겠다는 입장을 표명해온 터였습니다. 지난 19일에는 서울 양재동 하나로마트를 찾아 “정부가 청탁금지법 시행령 개정을 논의 중이며 늦어도 설 대목에는 농축산인이 실감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국정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국무총리가 취임 이후 지속해서 법 개정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표명한 뒤 ‘3·5·10 개정은 없다’던 권익위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반대 의사를 밝혔던 박은정 권익위원장은 개정 다음날인 12일 “가액 범위가 조정되더라도 공무원의 직무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으면 선물을 받을 수 없다”며 “가액범위를 일부 조정한다고 해서 김영란법의 취지가 후퇴되는 것은 아니다”는 옹색한 입장을 내놨습니다.

■ 농축산인의 숙원 ‘10만원’?

“국가 청렴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국가 청렴으로 인해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국회와 정부는 힘없는 농어민과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 달라”

-2017년 1월6일 전국한우협회 성명서

김영란법 시행 100일을 맞아 전국한우협회가 낸 성명의 내용입니다. 농축산인들은 김영란법의 선물 상한을 올려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 왔습니다. 왜 농축산인들은 ‘5만원 기준’이 농민들을 죽인다고 하는 걸까요?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나온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을 보면, 농축산인들의 주장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16년 5월12일 <조선일보> 1면.

김영란법 시행으로 한우·인삼·굴비·난·화환 등 명절이나 경조사 때 선물로 주고받는 품목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겁니다. 이들 품목의 선물은 보통 10만원대 이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5만원 이하의 선물은 내놓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습니다.

실제 5만원에 맞춰 품목을 구성한 사진도 보여줬습니다. 한우 선물세트는 6분의 1을 겨우 채웠고, 굴비도 10마리 중 2마리를 겨우 넣을 수 있었습니다. 사과 상자와 수삼 선물세트는 반토막이 났습니다. 한우를 키우는 농민은 “한우로 5만원짜리 선물 세트를 만들라고 하면 국거리 외에는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화훼업체도 그렇게 말합니다. 난의 90%가 선물용이고 보통 10만원이라고 합니다. 경조사용 화환을 판매하지 않고 운영 가능한 꽃집은 거의 없다고도 주장합니다.

2016년 5월12일 <조선일보> 3면.

이번 개정은 이들의 목소리를 전폭적으로 반영한 것일 겁니다. 그럼 왜 한도가 10만원 이었을까요? 권익위는 “이 부분에 대해선 정답은 없다. 객관적 합리적 분석 통해 어떤게 적정한 지 정하면 그걸 집행하면 되는 거다”라며 “다양한 자료를 종합해보면, 농축산분야에서 생산 감소가 있었기 때문에 농축산물 선물 상한을 높인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농축산물 선물 상한액을 높일 때 적정금액으로 국민의 52%, 공무원의 59.7%, 영향업종 54.8%가 10만원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10만원이면 농축산인의 숨통이 트인다’는 과학적 근거도 부족한 셈입니다.

명확한 근거가 없다보니, 개정안에 대한 불만만 난무합니다. 국민들은 개정 필요성을 납득하지 못하고, 농축산인들은 개정 역시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한우협회는 “선물의 상한액을 10만원으로 개정하는 안을 마련하는 것은 국내 농축수산인들과 소상공인들을 우롱하는 처사밖에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일부 완화 혜택을 받은 화훼업계는 “정부의 개정안은 현장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꽃 선물이나 조화를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화훼산업이 이미 붕괴 직전이다. 화훼를 경조사비의 가액범위 내에서 제외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김영란법은 누더기가 됐는데, 정작 업계에선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관련 기사: 김영란법 농수축산물 상한 10만원으로…화훼업계 ‘불만 여전’·외식업계 “우리도 대책을”)

이번 개정에서 제외된 소상공인 등 외식업계 역시 불만입니다. 소상공인연합회 관계자는 “김영란법 시행으로 식당 등 영세 상공인들이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며 “식사비도 상한을 조절해 외식업계의 타격을 완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법개정 근거 부족한 권익위원회

개정 이후 권익위원회는 12일 대국민보고 브리핑을 열고 가액범죄 조정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권익위는 “지난 1년간 시행된 부정청탁금지법의 사회·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결과, 공직사회·기업·학교 등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긍정적 변화가 확산됐다”면서도 “다만 한우·화훼 등 영향 업종에서의 생산액 감소로 인해 경제 전체적으로 총생산이 9020억원(총생산의 0.019%), 총고용은 4267명(총생산의 0.015%)이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한우·화훼·사과·배·수산 등의 거래량과 거래액이 실제 감소하는 등 농축산인들이 실제 피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권익위가 내놓은 자료 역시 김영란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엔 근거가 부족해 보입니다. 권익위 조사결과, 부정청탁·접대 감소 등으로 인한 경제효과가 더욱 컸던 겁니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한국의 뇌물관련 부패인식지수는 2016년 138개국 가운데 52위서 2017년 45위로 7계단 상승했습니다.

서울대는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가 현재 53점에서 63점으로 개선되면 국내총생산이 8조5785억원 증가할 거라는 연구를 내놨습니다. 부패인식지수 개선으로 중장기적으로 매년 5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매년 32조원의 세입 증대 효과가 있을 거라는 게 서울대의 분석입니다.

단기적으로 한우·화훼 농가 등에서 피해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론 이득이 된다는 겁니다. 단기적 피해를 본 한우·화훼·음식점 등도 일시적으론 영향이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권익위 자료를 보면, 한우 업종만 여전히 하락의 영향권에 있고, 이 역시 회복되는 추세이긴 합니다.

“농축수산물을 풀면 레스토랑은 왜 못 풀 것이며 공산품은 왜 못 풀겠느냐고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이 법의 취지는 각자내기 하라는 것이고, 선물도 직무관련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것. 원칙적으로 하지 말되 부득이 한 경우에만 '3-5-10' 한도내에서 하라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3·5·10 한도 내에서는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김영란 전 권익위원장

농축산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김영란법에 ‘예외’를 두었다는 이번 권익위의 법 개정은 과연 앞으로 어떤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될까요? 고가의 농축산물 생산업체를 살리려고, 공직자에게 뇌물을 주는 구조를 되살리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요? 다시 한번 이 법의 입법 취지를 돌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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