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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이란 흔들기로 더 멀어진 북한 핵합의

트럼프가 말끝마다 외치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실체는 '트럼프 퍼스트'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떨어져 동맹국조차 미국을 외면하는 사태가 온다면 그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전임자의 업적을 지우기 위해 국제적 합의조차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트럼프가 져야 할 것이다.

  • 배명복
  • 입력 2017.10.27 11:09
  • 수정 2017.10.27 11:16
ⓒCarlos Barria / Reuters

민주주의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많다. 정책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새 정부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걸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하기도 한다. 문제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바꿀 필요가 없거나 바꿔서는 안 될 정책까지 바꾸는 데 있다.

후임자는 전임자의 업적을 계승·발전시키기보다 흠집을 내거나 지우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약점이 많은 후임자일수록 더 그렇다. 큰 업적을 남긴 지도자를 전임자로 둔 '불운한' 후임자는 전임자를 격하(格下)시키지 못해 안달하기도 한다. 부동산 재벌 총수에서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그렇다. 버락 오바마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대통령이 됐나 싶을 정도로 트럼프의 오바마 지우기는 집요하고 철저하다.

트럼프 정부 출범 9개월 만에 오바마가 '유산(legacy)'으로 내세울 만한 것들은 대부분 깨지거나 금이 갔다. 취임하자마자 트럼프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국이 합의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무산시켰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국제적 합의인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도 탈퇴했다. 오바마의 '간판 정책'인 '오바마케어(국민건강보험)'는 누더기가 됐다. 불법체류자를 구제하는 이민법은 멕시코 국경에 건설 중인 '트럼프 장벽'에 막혔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자유무역협정도 '살생부'에 올라가 있다.

트럼프가 지운 오바마 업적 리스트에 또 하나가 추가됐다. 전임자가 어렵사리 타결해 잘 굴러가고 있는 이란 핵합의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지난 13일 트럼프는 포괄적 대(對)이란 전략을 발표하면서 "이란 핵합의는 지금까지 미국이 체결한 가장 나쁘고, 가장 일방적인 거래 중 하나"라고 혹평하고, 이란의 핵합의 준수를 인증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란이 합의 내용 중 무엇을 안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었다. 미 행정부는 '이란 핵합의 검증법'에 따라 90일마다 이란이 핵합의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평가해 인증 여부를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 트럼프는 취임 후 두 차례 인증했지만 세 번째 차례에서 명확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불인증으로 돌아섰다.

이란 핵합의는 2015년 7월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P5)에 독일과 유럽연합(EU)을 더한 7자(者)가 이란과 협상을 벌여 타결한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을 말한다. 안보리 승인을 거쳐 지난해 1월 발효된 이 합의에 따라 향후 15년간 이란이 보유할 수 있는 농축 우라늄은 농도 3.67% 이하 저농축 우라늄 300㎏으로 제한된다. 약 2만 개에 달하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는 평화적 목적에 쓸 6000개 정도만 남기고 다 폐기됐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이 의심되는 모든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접근을 허용했다. 이란은 유엔과 미국, EU가 부과했던 경제제재로부터 벗어나 석유 수출과 금융거래를 재개했다. 해외에 동결됐던 약 1000억 달러의 자산도 되찾았다. 핵 프로그램의 부분적 폐기와 동결을 제재 해제와 맞바꾼 게 이란 핵합의의 골자다.

IAEA는 이란 핵합의 이후 8차례에 걸쳐 사찰을 실시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핵합의에 참여한 영국·프랑스·독일 등 동맹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도 이란이 핵합의를 준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이들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불인증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의회가 동맹국과 협력해 이란 핵합의의 많은 결함을 해소해 달라"고 의회에 공을 떠넘겼다. 아무튼 문제가 많으니 알아서 고치지 않으면 대통령 권한으로 탈퇴를 선언하겠다는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불인증 결정에 따라 미 의회는 60일 내에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재개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의회가 이란의 국제 금융활동을 차단하고 석유 수출을 금지하는 종전 제재를 다시 부과하기로 결정한다면 후폭풍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이란 핵합의의 나머지 당사국들이 합의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제재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현실화하면 이란도 핵합의를 파기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위험한 대결 구도로 돌아가면서 이란 핵 문제가 다시 국제사회에 발등의 불이 될 수 있다.

오바마가 만든 것을 대안도 없이 깨고, 의회에 뒤처리를 떠넘기는 트럼프의 전임자 지우기 공식이 이란 핵합의에도 적용되면서 그 불똥은 엉뚱하게 한반도로 튀고 있다. 협상을 통한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더욱 요원해진 것이다. 크리스 머피 미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란이 합의를 지키는데도 미국이 플러그를 뽑는다면 미국의 신뢰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며 "김정은이 무얼 믿고 미국과 합의를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이 더욱 희박해졌다는 지적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사설에서 트럼프의 조치를 '정치적 허영심과 지정학적 바보짓'이라고 비판한 대로 트럼프는 이란의 핵합의 준수 불인증으로 중동을 다시 불안에 빠뜨리고, 한반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위험한 자충수를 뒀다. 긁어 만든 부스럼이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물론 조셉 던퍼드 합참의장까지 이란 핵합의 유지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트럼프는 무시했다.

자신의 지지층에게 트럼프는 강하고, 그래서 전임자의 유산은 뭐든 다 깰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국내 정치적 목적 이상의 심모원려를 찾기 어렵다. 굳이 다른 효과를 찾는다면 이란 핵합의에 반대해 온 이스라엘을 만족시키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이슬람 세력을 위협하는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 이란을 흔드는 정도다. 반면 그것이 몰고 올 국제 정치적 파장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이란 핵합의가 흔들리면 합의를 주도한 하산 로하니 대통령 등 온건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이슬람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커지면서 중동은 더욱 불안정해질 것이다.

트럼프는 최대한의 압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겠다며 경제적·군사적 압박에 올인하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말 한마디로 이란 핵합의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북한이 협상장에 나올 걸로 기대하는 건 난센스다. 협상은 답이 아니며 어떤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실전배치해 핵무장을 완성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김정은은 더욱 굳힐 것이다. 그로 인해 북한의 핵무장 완성 전 협상을 통한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드는 시점이 오면 트럼프는 결국 군사적 옵션을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크다.

미 정부 당국자들은 이란 핵합의 불인증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고조되자 트럼프의 결정은 북한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 대사는 "대통령의 결정은 우리가 앞으로 (이란 핵합의 같은) 나쁜 합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완벽한 메시지를 북한에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폐기가 아닌 부분적 폐기와 동결 선에서 타협해 핵무기 개발 여지를 남긴 이란식 협상은 북한과 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북한이 협상에 응하더라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CVID)'가 아니면 안 된다고 선을 그은 셈이다.

북한 핵과 미사일 활동의 동결이 아니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목표라고 배수진을 친 결연한 의지는 평가할 만하지만 문제는 북한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그런 의지는 아무 소용없다는 점이다. 찬물을 먹이든 뜨거운 물을 먹이든 말을 물가로 끌고 와야 물을 먹일 것 아닌가. 트럼프는 이란 핵합의 불인증으로 북한을 물가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란이 '제2의 북한'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말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일 수 있다. 트럼프의 불인증 결정으로 이란 핵합의가 깨지면 이란은 핵 개발을 재개할 공산이 크다. 핵합의로 이란의 '브레이크아웃 타임'은 2~3개월에서 1년으로 늘어났다. 핵 개발을 결심하고 핵무기 한 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분량의 핵 물질 제조에 걸리는 최소한의 시간이 브레이크아웃 타임이다. 지금 상태에서도 이란이 작심하면 1년 만에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은 중동과 한반도 양쪽에서 핵을 가진 두 '불량국가'와 맞서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이란의 핵합의 준수 불인증이라는 트럼프의 무모한 결정은 김정은이 핵무장 완성이란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한반도에 전화가 밀어닥치는 악몽의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신호탄일지 모른다. 또 다른 악몽은 이란이 핵무기 생산을 위한 핵 활동을 재개하고, 이스라엘 폭격기가 이란으로 날아가면서 시작될 것이다.

트럼프가 말끝마다 외치는 '아메리카 퍼스트'의 실체는 '트럼프 퍼스트'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떨어져 동맹국조차 미국을 외면하는 사태가 온다면 그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전임자의 업적을 지우기 위해 국제적 합의조차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트럼프가 져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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