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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하늘이다 | 계속되어야 할 촛불혁명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뉴스1

촛불시위는 혁명이었는가? 혁명이라면 어떠한 의미에서 혁명이었는가? 촛불시위로 탄핵을 이뤘다. 대통령 교체까지 성취했다. '촛불정부'가 구성되어 새로운 정책과 예산을 만들고 집행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까지 "문재인정부는 '촛불혁명'의 산물"이라고 하는 지금, 다시 묻는다, 촛불시위는 혁명이었는지. 촛불시위가 진정 혁명이라면 그 혁명성을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야 그 혁명이 완성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촛불시위가 어떤 혁명이었는지를 묻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변혁의 힘이 왜곡되거나 좌절되지 않도록 하려면 바로 그 힘의 성격과 방향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촛불시위는 시민혁명이다

촛불시위의 전 과정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면 그 혁명성은 보이지 않는다. 촛불시위는 헌법뿐만 아니라 법체계라는 체제 안에서 진행된 준법활동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촛불은 이러한 보수성을 훨씬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촛불시위 직전의 상황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5년 말/2016년 초에 횡행하던 위기감, 그 위기감을 반영했던 '신종 쿠데타' '저강도 쿠데타' 또는 '변형 파시즘' 논의를 소환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중반까지 한국사회에서는 구 유신세력, 더 광범위한 수구지배세력이 87년체제의 틀 안에서 87년체제를 형해화시키고 지배체제를 공고화하려는 '신종 쿠데타' 내지 '변형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반면 그들을 대체할 정치세력은 보이지 않았고, 저항은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탈출구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십년간 피땀으로 쌓아 올린 민주화의 성과가 무너지는 듯했던 바로 그 순간, 암흑으로 보였던 바로 그 순간,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촛불시위는 반민주화, 반진보의 거센 움직임에 대항해 이를 막아냈다는 진보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도 역시 촛불시위의 역사적 의의를 온전히 살려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지점에서 촛불혁명이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새해에도 가만있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 2016.12.28)이었다는 백낙청의 주장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헌법이 지켜지지 않는 구조로 작용하던 '이면헌법', 분단체제의 한 현상인 이 이면헌법을 극복, 또는 적어도 돌파했다는 데 혁명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체제'에만 초점을 두고 혁명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행위자'에게도 응당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 프랑스혁명이 앙시앵 레짐을 붕괴시켰다는 얘기의 다른 측면은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지가 프랑스 사회의 주인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라면, 촛불혁명이 진정으로 혁명적이었던 점은 지배세력이 아니라 시민이 한국사회의 주인으로 등극했다는 점이다. '시민의 탄생'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뤄졌다면(송호근), 그 시민은 식민지배와 분단체제의 질곡 속에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 시민이 스스로 든 촛불로 담금질이 되어 이제 주인으로 성숙한 것이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지난 백년간 온갖 사회운동과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거쳐 그리고 시민운동을 거쳐, 그리고 그 축적된 역량 위에서, 어느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시민이 스스로 하늘이 되는 것으로 구현됐다. 이제 시민이 하늘이다. 그래서 혁명이다.

시민이 주인인 '촛불 거버넌스'

이렇게 '시민혁명'으로 촛불의 성격을 명확히 할 때 앞으로의 과제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과제의 핵심은 촛불정부를 딛고 넘어, 시민을 하늘로 모시는 '촛불 거버넌스'를 만드는 것이다. 촛불 거버넌스는 시민이 주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광의의 협치이다. 시민이 국가 및 시장과 소통하고 협력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이다. 그러한 협치의 기제를 다양한 층위와 위치에서 만들어내는 일이 촛불혁명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것일 터이다. 서울시와 문재인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시민과의 소통이 그러한 면에서 중요하지만, 이도 자칫 시민을 의견 청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시민이 능동적인 주인으로 참여하는 거버넌스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접합시키되 그 둘을 뛰어넘는 제도를 요구한다. 또 중앙정부와 시민 사이의 협치뿐만 아니라, 지방정부와 지방시민 사이의 협치, 직장 단위에서의 협치, 삶의 터에서의 협치, 학교에서의 협치 등 협치를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주말의 광화문'에서만 시민이 주인이었다면, 이제는 그 공간과 시간을 더 넓혀가야 한다.

87년 민주화가 성취한 자유민주주의적 대의제도가 시민을 관중 내지 유권자 정도로 전락시켰다면, 촛불시민은 더이상 정치의 구경꾼으로, 손님으로, '을'로 남아 있는 것을 거부한다. 지난 3월 11일, 20차 촛불에서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2017촛불권리선언〉에서 "촛불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의정치를 개혁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전진시키는 주권자행동"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개혁 10대 과제에 분단체제의 극복이니 통일이라는 구호가 포함되지 않아, 오히려 4·19혁명보다 후퇴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그래서 기우다. 한국의 정치·경제·문화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갑'의 연합이 분단체제와 상생의 관계라면, 그 체제의 모든 '을'들이 주인으로 나선다는 것은 분단체제를 안으로부터, 밑으로부터 변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는 타도나 전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 안에 협치의 새살을 가득히 채워 완전히 떨궈내야 할 껍데기이다. 촛불시위의 혁명성은 바로 그 과정에서 완성될 것이다. 하늘이 주인이다. 껍데기는 가라.

하지만 현재 정치권은 거버넌스를 '협치'로 치환하고, 그 의미도 '제(諸) 정당 간의 협업' 정도로 축소하고 있다. 시민을 배제한 그런 협치야말로 바로 촛불이 태워버리려 한 적폐의 하나일 것이다.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일부 정당들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시민 없는 대의제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재인정부의 인사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원천 배제되고 있는 것도 촛불 거버넌스와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청문회 제도의 개선책에서도 시민의 역할이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문재인정부에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참여하는 것이 '시민사회와의 협치'라고 비꼬는 것도 온당치 않다. 과거 보수정부도 민주정부도 시민사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수혈'받았고, 그러한 수혈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술이다. 시민을 배제한 거버넌스를, 시민을 주인으로 모시는 거버넌스로 바꾸는 수술이 촛불혁명의 지상명령이다. 향후 정치일정과 개헌 논의에서 살려야 할 핵심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에서 퇴진행동은 하늘을 받아들이는 한 모델을 보여줬다. 시민이 계몽의 대상도 아니고 동원의 대상도 아니었다. 퇴진행동은 시민을 위해 자리를 깔아주고 시민이 그 무대의 주연으로 서도록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시민운동단체와 노동운동조직, 정부와 시장이 모두 앞으로의 역할을 두고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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