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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평화는 누군가의 강요당한 침묵으로 가능한 것이다

누군가는 '나는 이 사회에 그런 정도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금까지 누려온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자 한다. 강남역에 모여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는 여성들 앞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남성도 군대 가서 죽고 일하다 죽는 사회적 약자"라고, "남자 여자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렇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나중에"를 외친 대선후보와 그를 함께 연호한 이들이 그렇다.

글 | 가람(평화학+교육학 연구자, 비폭력트레이너)

존재 자체로 위협을 받는 사람들

지난 17일 수요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일 년 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포스트잇을 들었다. 같은 날 새벽 청주의 어느 화장실에서는 성폭행을 하려는 남성에게 구타당하던 한 여성이 겨우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그 전날인 16일 대한민국 군 검찰은 한 동성애자 남성 육군대위에게 '군형법 92조의6'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구형했고, 일주일 후인 24일 군사법원은 "동성 군인과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인정된다"며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의 유죄를 선고했다. 해당 판결이 난 24일, 한 여성 해군장교는 직속상관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이 사건들에는, 각각 명백한 대상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차별과 폭력은 그 뿌리가 깊이 뒤얽혀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여성을 살해한 남성은 "내가 여성들로부터 여러 피해를 당했"고 "평소 여성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사건이 조현병 환자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묻지마 살인'이라고 결론지었다. 여성혐오(misogyny)에 의한 여성살해(femicide) 사건을 마주한 국가 권력의 선택은, 여성이라는 특정 사회집단에 대한 차별, 혐오, 폭력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도모하는 대신 또다른 사회적 약자 집단인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 혐오, 폭력으로 덮는 것이었다.

강남역 10번출구 살인사건 1주기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희생자를 추모하며,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며 사람들은 다시 포스트잇을 들었다.

'군형법 92조의6'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육군 대위는 사적 공간에서 업무상 관련 없는 상대와 합의된 성관계를 가졌다. 이 상황에서 유죄 판결의 유일한 증거는 상대가 동성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판결은 명백하게 국가가 저지른 성소수자 혐오 사건이다. 만약 그가 이성애자였다면 그는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군 검찰이 해당 대위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던 5월 16일의 다음날인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이었고,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은 그는 법정에서 쇼크를 받고 쓰러지며 머리를 다쳐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가 쓰러지던 날 옆 동네 대만에서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었다.

당신의 평화는 우리들의 강요당한 침묵으로 가능한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았음에 안도해야 하는 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이다. 이 사회는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연령, 장애, 경제적 계급, 사회적 신분, 혼인여부, 출신국가, 인종, 종교, 용모 등의 신체조건, 병역 등 수많은 기준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고 집단을 나누어 차등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수많은 기준들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 '미성년'자에게는 일상이 전쟁이고, 매일 매일이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누군가는 '나는 이 사회에 그런 정도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금까지 누려온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자 한다. 강남역에 모여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고 서로의 고통에 공명하는 여성들 앞에서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남성도 군대 가서 죽고 일하다 죽는 사회적 약자"라고, "남자 여자 싸우지 말고 화해하자"고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렇다. 성소수자 인권 문제에 "나중에"를 외친 대선후보와 그를 함께 연호한 이들이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어떤 기준 하나쯤에는 반드시 차별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걸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못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못했기 때문에,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에 부합하지 않/못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지금까지 누려온 '평화'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의 입을 막고 존재를 지움으로써 유지되는, 일상이 된 권력이었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81)가 이미 30년도 전에 일찍이 외쳤던 것처럼, "당신의 평안은 나의 침묵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분석이 2017년에도 유효할 줄 그녀는 알았을까.

직관적이고 간결한 이미지와 메시지의 결합을 통해 성차별적 이데올로기(sexism)에 저항하는 작품들로 유명 유명한 바바라 크루거의 포스터. 혐오와 차별의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야 터져나온 목소리들로 인해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보스몹 한 마리 잡아서 깔끔하게 끝나는 일이면 참 좋겠는데, 이토록 촘촘하게 우리 모두를 옭아맨 차별과 혐오는 그렇게 쉬이 답안지를 내어주지 않는다. 2017년 3월 10일 '보스몹' 박근혜를 끌어내렸다고 이 사회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듯이. 이 사회 구석 구석 다양한 측면과 층위에서 작동하는 차별과 혐오의 정치는, 지금껏 주류 사회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런 차별과 혐오는 없다'고 '평화'를 가장하거나, '분열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평화'를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 수많은 차별과 혐오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에 사회 전체가 민감해질 때에야 비로소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힘의 논리, 위계질서, 지배, 통제와 복종, 우월성, 획일성 등의 군사주의적 가치와 태도를 뿌리깊이 내면화한 사회에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실현하려면 폭력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평화가 가장 요구되고 강조되는 때는 평화로울 때가 아니라 평화가 부재할 때, 즉 폭력이 발생할 때이기 때문이다. 폭력에 민감해지는 감각을 기르는 것, 현상 뒤에 가려진 폭력의 맨얼굴을 읽어내고 긴밀하게 그러나 교묘하게 연결된 폭력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는 분석력을 기르는 것, 그럼으로써 누군가에게 가해진 폭력이 결코 나와 무관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다른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평화의 문화를 단단히 뿌리내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정의로운 방향으로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건 그런 것이다.

"(억압받아온 여성,)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온 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정희진의 말처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온 이들이 폭력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질수록 그들의 강요당한 침묵으로 유지되어 온 부정의한 사회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꽤나 오래 전부터 목이 터져라 소리질러왔지만, 이제야 겨우,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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