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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맨 브라더스의 그렉 올맨이 향년 69세로 타계하다

  • 김태우
  • 입력 2017.05.28 07:50
  • 수정 2017.05.28 07:51

전설적인 록 밴드 '올맨 브라더스'의 그렉 올맨이 향년 69세로 별세했다.

올맨의 공식 웹사이트에 올라온 성명에 따르면 그는 조지아 주 사바나의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렉 올만은 "지난 몇 년간 건강상의 문제"를 겪어왔다. 그는 그동안 영혼을 치유해줄 팬들을 위해 형제들과 여행을 다니며 공연을 하려고 했었다. "음악은 그를 기쁘게 하고, 가장 힘든 시간에도 버틸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올맨은 1947년 12월 8일, 내슈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 듀에인과 함께 역사상 최고로 성공적인 클래식 록 밴드를 만들었다. 밴드의 성공에 따라온 건, 음악뿐만이 아니었다. 마약과 여자, 그리고 가끔은 슬픈 일도 있었다. 이중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듀에인의 비극적인 사망이었을 것이다.

말년에는 C형 간염에 걸리며 부정맥과 호흡기 감염으로 고생했으며, 간 이식을 받기도 했다. 이에 그는 지난 2017년 여름, 콘서트 투어를 취소한 바 있다.

그렉 올맨은 노르망디 해변을 공격한 세계 2차대전 참전용사 윌리스 올맨과 제럴딘 올맨 슬하에서 태어났다. 윌리스 올맨은 그레그가 2살 된 해,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가 등에 총을 맞으며 사망했다.

그렉과 듀에인은 부친의 군 경력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 롤링스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친에 의해 보내진 군사 학교를 혐오했지만, 학교에 다니며 음악에 대한 관심을 키우게 됐다.

올맨은 지난 2015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을 흑인들에게서 배우게 됐다"며, "흑인 음악을 주로 틀어주는 라디오를 자주 듣곤 했는데, 우리 둘은 머디 워터스와 하울린 울프의 노래를 듣다가 '스파게티 면이 벽에 찰싹 달라붙는 것'처럼 충격을 안겨줬다."라며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올맨 브라더스가 결성되던 1969년 즈음, 그렉과 듀에인은 컨트리 음악을 즐기던 히피였다. 긴 머리에 마약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들 말이다. 듀에인은 기타를 쳤고, 그렉은 노래를 불렀다. 밴드 결성 당시에는 드러머인 '부치' 트럭스와 자이 '자이모' 조니 존슨, 기타리스트 '디키' 베츠와 베이시스트 '베리 오클리' 등과 함께 공연하러 다녔다.

올맨 브라더스는 컨트리 음악과 재즈, 블루스, 서던 록 음악을 결합했다. 이들이 만든 새로운 장르의 음악은 1995년, 올맨

브라더스를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리고, 2012년에는 그래미 시상식서 평생공로 상을 수상하도록 했다. 또한,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는 올맨의 밴드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올맨 브라더스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걸쳐 'Ramblin' Man,' 'Midnight Rider' 등 최대 히트곡들을 발표했다. 밴드는 이 시기에 마약을 수시로 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드러머 부치 트럭스는 지난 1999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렉은 꽃미남이었다. 멋진 금발을 자랑했고, 여자들은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전했다.

한편, 그렉 올맨은 자서전인 'My Cross To Bear'를 통해 자신의 성적 편력을 과시했다.

올맨은 이 책에서 "호텔 방 4~5곳에 여자들을 두기도 했다. 걱정마시라. 나는 아무한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종종 '곧 돌아올게'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그와 밴드는 PCP, 코카인 등 여러 종류의 마약을 즐겨 했다. 그중에서도 환각 버섯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이 버섯을 비공식 로고로 만들고, 각자 종아리에 버섯 모양으로 타투를 하기도 했다.

밴드가 '스타'로 불리기 시작한 지난 1971년, 듀에인 올맨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그는 24세였다.

그렉 올맨은 2015년, 가디언지에 "듀에인은 웃음의 왕이었다. 항상 농담을 던지곤 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듀에인이 우리에게 원했던 일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듀에인의 장례식에서 형이 치던 기타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그렉 올맨은 300여 명의 조문객에게 "이건 정말 오래된 기타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악기이지 않은가? 1920년에 만들어졌고, 갖게 되어 정말 자랑스럽다. 와줘서 감사하다."라고 전했다.

올맨은 1975년, 가수 셰어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단 9일 동안 지속됐고, 올맨이 헤로인을 구하던 중 셰어에게 칼을 들이밀면서 끝났다. 그러다 셰어가 아들 일라이저 블루를 임신하면서 화해했다.

2년 후인 1977년, 셰어는 올맨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정리했다. 셰어는 한 시상식에서 올맨이 스파게티가 담긴 접시에 얼굴을 박은 채 쓰러지면서 이혼을 결정하게 됐다.

올맨은 2012년 발행한 회고록에서 "나는 가끔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남에게 준 고통을 떠올리곤 한다."라며 후회를 표출했다.

올맨은 결국 술을 끊었다.

올맨은 지난 2013년, 사바나 모닝 뉴스에 출연해 "잘 지내고 있다. 내가 마약과 술을 끊은 지도 벌써 19년째다."라고 밝힌 바 있다.

미드나잇 라이더가 편히 잠들기를.

 

허프포스트US의 'Gregg Allman, Classic Rock Legend Of The Allman Brothers Band, Dead'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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