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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독고다이' 홍준표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빼곡한 이야기다

  • 허완
  • 입력 2017.04.01 06:33

[토요판] 뉴스분석 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홍준표의 과거와 미래

▶홍준표 경남지사(63)가 31일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됐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총장과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선 불출마 결정으로 얻은 어부지리이긴 하지만, 2012년 총선 때 떨어진 뒤 정계 은퇴를 고민했던 정치인으로서는 나름 ‘화려한’ 부활입니다. 홍준표 후보는 늘 빨간색 의복을 하나 이상 입는 데서 알 수 있듯 튀는 정치인입니다. 강한 자에게 맞서기도 하지만, 약자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는 독특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봅니다.

15대 총선을 앞둔 1996년 1월 중순 어느날 밤 늦은 시각 서울 북아현동 이기택(당시 민주당 총재) 집에는 한 손님이 찾아왔다. 1995년 초 인기리에 방영됐던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실제 모델로 유명했던 변호사 홍준표였다. 1995년 10월 초 검찰에 사표를 낸 홍준표는 정치권을 노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이기택이 기다리는 지하 서재로 안내 받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이기택은 1층 응접실에 있던 보좌관 조광한을 불렀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지?”

“네”

“홍 검사가 우리 당에 와서 같이 하기로 했네. 자네가 잘 도와주게.”

홍준표는 조광한에게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홍준표 입당 기자회견 날짜까지 잡았지만, 홍준표는 1월25일 김영삼의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의 전신)에 입당했다. 전날 밤 제정구, 유인태, 이철, 노무현 등 민주당 사람들이 홍준표 집에 찾아가 새벽까지 함께 하자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야당과 여당을 놓고 오락가락하다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민자당을 선택했다. 그는 그후 “당의 요구”에 따라 디제이 저격수 등 대여 공격에 오랫동안 앞장섰다. 사진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한 홍준표 당시 의원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자택을 찾아 인사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홍준표는 훗날 “내가 사는 서울 강남을에 나가겠다고까지 했으나 이기택 총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확답을 주지 않고 심드렁했다. 그래서 무소속 출마를 고려하고 있던 중 청와대로부터 입당 제의가 왔다.(…) 대리인을 통해 온 입당 조건은 어느 지역구라도 좋고 현역이 있는 곳이라도 내가 선택하면 바꾸어주겠다는 것이다”(저서 <이 시대는 그렇게 흘러가는가>)고 밝혔다. 그러나, 홍준표가 검사직 사표를 냈을 때 이미 그가 “민자당 공천을 바라고 있으며, 여권과 교감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야당의 거물과 맞붙고 싶다고 했다”(<경향신문> 1995.10.4)는 보도가 나왔다.

언론플레이에 눈을 뜬 날

홍준표는 전형적으로 ‘개천에서 난 용’이다. 1954년 경남 창녕에서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서당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신식교육에 밀려난 데다가 술 좋아하는 한량 기질 때문에 가정사에는 등한했다. 이 때문에 홍준표는 초등학교 6년 간 가재도구를 실은 리어카를 따라 대구와 합천 등으로 5번이나 이사다녔다. 누나들과 여동생은 홍준표 뒷바라지를 위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며, 그는 장학금을 주는 영남중·고를 택했다. 이것은 그에게 콤플렉스로 남았다. 이른바 일류인 경북고를 나온 강재섭이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남고도 학교냐”며 홍준표를 놀렸다가 오랫동안 원수가 됐던 일은 유명하다. 그는 그저 “다시 돌아가면 공부 안 하고 일찍부터 장사를 할 거다. 그래서 돈 많이 벌어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다.”(저서 <나 돌아가고 싶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한량 기질이 있던 아버지를 닮아 노래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는 지금도 옛날 노래 500곡을 거뜬히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고려대 시절 하숙집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 부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홍준표는 학비가 없는 육사에 지원했지만, 아버지가 도난 비료를 샀다는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 검사가 되려고 1972년 고려대 법대에 들어갔다. 늘 노란 양말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녀 쉽게 눈에 띄고 입심이 좋긴 했지만, 유신 독재 등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은 별로 없었다. 친구의 부탁으로 유인물을 몇번 써줬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두드려 맞고 나온 뒤에는 고시 공부에만 매진했다. 고시생 때인 1976년 홍준표는 고려대 앞 은행에 돈찾으러 갔다가 창구에서 일하던 “달덩이처럼 생긴 아가씨”에게 한눈에 반했다. 아내 이순삼(62)과의 만남이었다.

홍준표가 정치 입문 때부터 거물급 취급을 받은 것은 드라마 ‘모래시계’ 덕이 컸지만, 그는 실제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꼴통 검사’였다. 마피아 등 거악들과 비타협적으로 싸웠던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검사에 빗대 ‘한국의 피에트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1984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청주지검에서 초임검사로 일할 때였다. 물먹인 소를 잡는 도축장을 수사하던 중 법무장관 처가쪽 사람이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검찰에 붙잡혀온 법무장관 인척은 “홍 검사, 당신 지금 실수하는 거요”라고 협박했지만, 홍준표는 그를 구속했다.

홍준표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근무할 때부터였다. 1988년 5공 비리 청산작업의 하나로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권 강탈 사건이 그에게 맡겨졌다. 처음 대검에서 내려온 지시는 ‘해명성 수사’였다. 홍준표는 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의 형인 전기환이 노량진 수산시장의 운영권을 빼앗는 과정에 청와대와 서울시, 국세청, 감사원, 치안본부(현 경찰청) 특수대 등 권력기관이 줄줄이 관련돼 있다는 것을 알고는 두팔을 걷어부쳤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핵심 피의자인 서울시 산업경제국장을 귀가시킬 것을 종용하는 등 수사에 제동을 걸었다.

울분을 토하던 홍준표는 이때 언론 플레이라는 일생의 ‘배움’을 얻었다. 산업경제국장이 득의만만하게 집으로 돌아간 뒤 홍준표는 풀이 죽어 사무실을 나섰다. 청사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동아일보> 기자였다. 홍준표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새벽까지 통음하면서 기자에게 수사 내용을 알려줬다. 이튿날 신문에 노량진 수산시장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여론이 들끓었고, 검찰 수뇌부는 수사 재개를 허락했다. 상부와 줄달리기 끝에 전기환 등을 간신히 구속했지만, 홍준표는 검찰 내부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찍혔다. 이후 그는 6공화국 실세인 박철언과 대전고검장 이건개 등 권력자를 구속했던 1993년 슬롯머신 비리 수사 등 주요 고비마다 언론을 활용했다. 정치인이 된 뒤에도 홍준표의 언론 플레이는 유명했다.

룸살롱 사진에 정보부 사건 덮어

초임 검사 시절의 홍준표 경남지사. 홍 지사는 1977년 고려대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1982년 사법고시에 합격, ‘모래시계 검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홍준표 캠프 제공

물론, 홍준표의 실제 검사 생활은 ‘모래시계’와는 많이 달랐다. 청주에서 일할 때 그는 중앙정보부 간부 한명의 비리를 내사하다가 도중에 사건을 덮었다. “정보부 관계자가 사진 한장을 내밀어요. 제가 룸살롱에서 술마시는 장면이더군요.…공교롭게도 찍힌 사진에는 제가 두 여자 사이에 앉아 있는 겁니다.” “집사람이 볼까 겁이 났어요. 겁이 나서 정보부 내사 서류를 넘기고, 그 사진 받고 필름까지 넘겨달라고 했어요.”(<월간조선> 2011년 9월호). 징계감이었다.

또, 피의자를 손찌검한 적도 있다.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인 2008년 11월 그가 가까운 몇사람과 만나서 한 얘기다. “임채진(검찰총장)이 아무 것도 결정 못하고 헤매고 있다. 검사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지하실로 데려가서 패야 한다. 예전에 검찰에서는 그랬다. 눈가리고 정신없이 패면 쪽팔려서 상관한테 맞았다고 얘기도 못하고 말을 잘 듣게 된다”면서 “나는 검사를 팬 적은 없지만, 00지검에 있을때 한 판사의 계좌를 추적해서 비리가 다 나왔는데도 그가 불지를 않더라. 그래서 판사를 팬 적은 있다”고 말했다. 당시 광우병 문제를 다룬 MBC 피디수첩 제작진에 대한 수사를 맡은 담당 부장검사 임수빈이 무혐의를 주장하면서 사표를 쓰는 등 상부의 구속 지시에 맞서던 때였다. 검사를 바꿔 피디수첩 제작진을 기소했지만, 결국 무죄 판결이 났다.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저울질한 끝에 여당에 둥지를 튼 홍준표는 정권교체로 1998년부터 야당 의원이 됐다. 검찰에서 일류 칼잡이였던 홍준표는 정치인이 돼서도 “당(조직)의 요구”에 충실했다. 그는 디제이(김대중)와 노무현 저격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 시절 전국을 돌면서 장외집회할 때 홍준표는 이회창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선동연설을 했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꼬마 민주당이나 국민회의에 갔었다면 (자신의 생각과)부합했을 것”이라며 “어쩌면 이회창 후보를 공격하는 킬러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한겨레> 2004.2.18)이라고 말했다.

공격수 노릇을 하던 홍준표가 정치 거물이 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다. 이명박 정부 첫 여당 원내대표(2008년)와 최고위원(2010년)을 거쳐 당 대표(2011년)에까지 올랐다. 자기 계보원 한명 제대로 없었던 그의 고공행진은 이명박의 지원없이는 불가능했다. 홍준표는 15대 총선 때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1999년 의원직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같은 처지로 워싱턴DC에 와 있던 이명박과 골프를 치면서 친해졌다. 홍준표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형님”이라고 했지만,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각하”라고 불렀다. 아무한테나 막말하는 무대뽀처럼 보여도 강자에게는 깍듯했다.

2012년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꿈에 부풀어 있던 홍준표는 그러나, 2011년 말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태로 집권 여당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어 2012년 4월 총선에서조차 떨어지자 한때 정계 은퇴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해 12월 대선과 함께 치러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경남지사 홍준표는 국회의원 홍준표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었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반값 아파트법’을 발의하고, ‘국적법’ 개정에 앞장서는 등 중도 개혁적인 노선을 걸었다. 세금을 늘려 공공지출과 복지정책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디제이 햇볕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한겨레>2004.2.18). 그러나, 경남지사로서의 홍준표는 학생들의 무상급식을 중단하고, 진주 의료원을 폐쇄하는 등 ‘우파 스토롱맨’을 자처했다. 막말과 폭언도 늘었다. 도지사의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하는 야당 도의원을 향해 “쓰레기”라고 하는가 하면, 의료원 폐쇄에 대한 비판을 “개가 짖는 소리”라고 했다.

돈 안받았는데 전달자 회유?

대선후보 홍준표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된 불법 정치자금 의혹이다. 경남기업 회장을 지낸 고 성완종이 2015년 4월 숨지기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홍 지사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 나왔을 때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을 시켜 1억원을 건넸다”고 밝혔다. 윤승모 역시 언론 인터뷰와 검찰 조사에서 돈 심부름을 한 상황을 자세하게 진술했다. 1심 유죄(1년6개월 징역과 1억원 추징)와 달리 2심은 무죄로 나왔다.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는 데다가 사건 실체에 대한 상식적인 의문은 여전하다.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면 검찰 수사를 앞두고 홍준표의 측근인 엄창현과 김해수가 왜 윤승모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서 “돈을 홍준표가 아니라 나경범 보좌관한테 준 것으로 하면 안 되겠느냐’고 회유했겠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빨간색의 넥타이나 셔츠, 속옷을 매일 한두개씩은 반드시 입는다. 독특하게 튀는 패션은 홍 후보의 상징이기도 하다. 홍 후보가 지난 2008년 12월 말 한나라당 원내대표 시절 예산안 날치기를 막기 위해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뚫고, 검사와 정치인의 험준했던 길도 홀홀단신으로 개척해온 홍준표는 마침내 제2당의 대선후보 자리를 차지했다. 같은 뿌리였던 바른정당과의 후보 단일화 등을 통해 보수세력의 재건자, 나아가 중심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홍준표의 앞날 역시 순탄할 것 같지 않다. 당장 보수 연대의 한쪽 당사자인 바른정당의 후보 유승민이 그와의 단일화에 부정적이다. 유승민은 30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홍 후보가 나 대신 대통령이 돼도 좋으냐는 건데 내가 승복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불법 정치자금으로 재판받는 사람을 보수의 대표로 내세울 수 있나”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대법원 판결이 남은 상황에서 대선 후보로 나선 자체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며 “친박계에 대한 태도도 오락가락하고 있어 바른정당과 연대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선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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