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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은 팀장이 된다는 것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잖아. 너는 그냥 너처럼 하면 돼." 그 답을 받고 나는 지하철 몇 대를 보내며 승강장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자고 외모를 먼저 생각한 걸까. 여자를 외모로 평가하는 것에 그토록 분노하는 나면서, 왜 정작 스스로를 외모로 평가한 걸까.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왜 '카피라이터'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니 낯선 직함 앞에서 늘 외모부터 떠올렸을까. 생각은 복잡해졌다.

  • 김민철
  • 입력 2017.03.09 10:29
  • 수정 2018.03.10 14:12

합격했다. 그것도 광고회사에. 무려 카피라이터로. 멋있고, 예쁘고, 창의적이고, 때로 '돌아이' 같은 재기발랄한 사람들만 잔뜩 모여 있을 것 같은 회사에 내가, 파릇파릇한 신입사원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것이다. 2005년의 일이다.

아무에게나 명함을 내밀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저기요, 혹시 카피라이터라고 아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그 멋있는 이름이 바로 제 직업이죠. 하하하하"라고 말하고 싶어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출근해보니 일반 회사와 크게 다를 건 없었지만, 어쨌거나 '카피라이터'라는 이름만은 근사했다.

이사부터 했다. 대학교 근처 옥탑방에서, 회사 근처 강남 뒷골목의 원룸으로. 유흥업소가 많은 동네라 그런지 어두웠고, 거칠었고, 인간적 교류 따위는 없었다. 출근길에도 술 취한 사람들을 자주 마주쳤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강남'의 모습과는 먼 동네였다.

한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와, 동네 실상을 보더니 말했다.

"야, 근데 너는 스펙만 들으면 되게 그럴싸해. 강남에 사는, 강남에 있는 광고회사를 다니는, 20대 여자 카피라이터. 캬. 근데, 그 모든 스펙을 들었을 때 상상되는 이미지와 너는 멀어도 너무 멀단 말이지. 쯧쯧."

"나도 정확하게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큭큭."

나는 그 흔한 명품가방 하나 없었고, 그걸 가지고 싶다는 열망조차 없었다. 외제차를 몰고 싶다는 욕망도 없고, 실은 외제차를 살 돈도 없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운전면허도 없었다. 하이힐은 불편해서 잘 신지도 않고, 펜슬스커트는커녕 청바지가 매일의 '교복'이었다. 젊은 광고인이라면 왠지 요즘 핫하다는 클럽에서 금요일 밤을 불태워야 할 것 같겠지만, 클럽에 가는 일 따위는 없고, 거기에 갈 때 입을 만한 근사한 옷도 없고, 실은 근사한 옷에 어울리는 몸매도 아니었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디엔에이(DNA)부터 '트렌드'라는 단어와 가장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였다.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하루는 그 친구가 회사 앞으로 놀러 왔다. 친구와 회사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같은 회사의 카피라이터를 만났다. 긴 머리카락에 운동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 화려한 하이힐, 멋있는 원피스, 당당한 걸음걸이. 그 카피라이터와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친구가 물었다.

"누구야?"

"우리 회사 카피라이터."

"완전 예쁘다."

"그지?"

"민철아, 내가 생각한 카피라이터는 저런 모습이야. 너 같은 모습이 아니라."

"그렇지. 카피라이터라는 단어와 딱 어울리는 친구지."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너도 저렇게 꾸며주면 안 돼?"

"응. 안 돼."

그 대화가 있은 지 12년이 지났고, 문제는 조금 더 심각해졌다. 여전히 '카피라이터'라는 단어의 아우라와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회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호칭을 내린 것이다. 팀장 격으로 승진을 한 것인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니. 이건 더욱더 소화가 불가능한 단어였다. 뭘 해야 하나.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우선 인터넷 쇼핑몰에서 단정한 옷부터 몇 벌 샀다. 광고주를 만날 일이 늘어날 텐데, 평소 차림으로 그곳에 갈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같은 회사 동료에게서 문자가 왔다.

'축하해. 원래 하던 일이니까 잘할 거야.'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살부터 빼야 될 듯.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어울리는 외모가 아니야.'

축하받는 일이 머쓱하기도 해서 나는 무심하게 그렇게 답을 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런데 완전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잖아. 너는 그냥 너처럼 하면 돼."

그 답을 받고 나는 지하철 몇 대를 보내며 승강장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자고 외모를 먼저 생각한 걸까. 여자를 외모로 평가하는 것에 그토록 분노하는 나면서, 왜 정작 스스로를 외모로 평가한 걸까.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콤플렉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왜 '카피라이터'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니 낯선 직함 앞에서 늘 외모부터 떠올렸을까. 생각은 복잡해졌다.

내가 남자였더라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이름 앞에서 나의 외모부터 떠올렸을까? 살부터 빼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을까? 사람들이 나를 외모로 평가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몸을 사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아니다'였다. 나의 팀장님은 본인이 쓰신 카피처럼 늘 '청바지와 넥타이는 평등하다'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이었다. 중요한 자리에도 청바지를 입으셨고, 때론 찢어진 청바지를 입기도 하셨다. 하지만 누구도 그분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았다. 상식과 다른 옷차림은 대부분의 경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개성'으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여자라고 해서 남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다른 기준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그 질문에는 누구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했다. '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어울리는 외모인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불필요했다. 질문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했다. '나는 어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고 싶은가?' 내가 되고 싶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덕목들을 줄 세운다면, 아마 맨 끝에 있는 단어가 '예쁜 팀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앞에 있는 팀장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매력 있는, 개성 있는, 야근 안 시키는, 질척대지 않는, 산뜻한, 빨리 결정을 내리는, 책임을 지는 팀장. 예쁜 팀장이 되는 것 말고도 되어야 할 팀장은 너무 많았다.

물론 요즘 매일 야근 중인 우리 팀 사람들이 지금 이 글을 읽는다면 "야근 안 시키는 팀장? 당신이?"라고 말하며 콧방귀를 뀌겠지? 그리고 야근할 때마다 나에게 "야근 안 시키는 팀장이 된다면서요"라고 말하겠지? 그렇게 나를 계속 놀려먹겠지? 어쩔 수 없다. 이제 막 시작이니까, 차근차근히 해나갈 수밖에.

* 이 글은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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