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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안방극장'의 숨겨진 유래

대중문화의 역사는 들여다 보는 것은 흥미롭다. 대중문화 자체도 친숙한데다가,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습이 정확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역사를 기술한 책이 많지 않았다. 여전히 이해당사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민감한 주제들이 여럿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과감하게 우리의 대중문화를 다룬 책이 나왔다. 양도 그렇지만, 깊이도 만만치 않다. 한국 영화, 드라마, 노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 책에 관심을 가져봄 직하다.

1. 우리 TV방송은 정치적 왜곡의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1961년 5월 16일, 미국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진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차지한 박정희는 막상 자신이 대통령이 되려면 2년 몇 개월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긴 했으나 당장 대통령을 갈아치울 수는 없었다. 바로 그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이 5.16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키고 한 달도 채 안 되었을 때, 공보처에 한 가지 지시를 내린다. ‘올해 안으로 국영 TV방송국을 개국시켜라.’ 그때가 6월인데, 역시 군인답게 속도전 하나는 끝내준다. 그렇게 해서 TV방송국이 6개월 만에 만들어진다. 공사 기간이 채 1년도 안 됐던 경부고속도로와 더불어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빨리빨리’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KBS TV방송국은 그렇게 출발했다. …. 박정희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생애를 걸고 쿠데타를 성공시키긴 했는데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도 없고,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 이런 척박한 미디어 환경에서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쿠데타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TV방송국을 설립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TV방송 시대는 애초 정치적 왜곡의 가능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출발했다.” (책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2’, 강헌 저)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었던 KBS TV방송국, 그 시작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나서일까? 그 후로도 여러 차례 KBS는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사실 미디어의 힘과 속성을 잘 활용하면 위정자들에게 그처럼 든든한 우군이 없다. 전쟁의 위기를 극복할 때도, 경제적 어려움을 헤쳐나갈 때도, 독재를 미화할 때도 유용할 수 있다.

2. 60년대 TV프로그램 인기 순위 1,2,3등은 이것이었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나 중요한 방송을 할 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TV가 있는 집에 모여서 봤다. 한 50~60명이 단체로 어느 집 안방에서 함께 TV를 보는 것이다. 특히 기억나는 건 레슬링 김일(1929~2006) 선수의 경기였다. 그런 게 방영되는 날에는 한 100명이 모여 함께 보고 함께 응원하느라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 당시 남자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던 프로그램은 1번 김일 프로레슬링, 2번 프로복싱, 3번 고교 야구였다. 프로복싱의 경우 그때는 세계 타이틀전은 거의 없었고 동양 타이틀전 경기라도 하는 날에는 온 동네 남자란 남자들이 다 모여들었다. 고교 야구 경기 중에 부산고나 경남고가 전국 8강에라도 올라가는 날에는 온 집안이 떠들썩하게 난리가 났다. 그럼 여자들은 무엇을 좋아했을까? 1960년대에는 여자들이 볼 만한 TV프로그램이 마땅히 없었다. TV드라마는 1970년대나 되어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화를 틀어주긴 했지만 보통 토요일 밤 늦게 상영되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가 방영된다 해도 여자들이 남의 집에서 밤 10시 넘어 TV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960년대 TV를 안방극장이라고 부르던 시절, TV콘텐츠의 대부분은 남자들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책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2’, 강헌 저)

‘안방극장’이란 표현은 흔히 들어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읽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TV가 귀하던 시절, 사람들은 TV가 있는 이웃집 안방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TV시청을 하였다. 몇 십 명에서 백여 명까지 모였다니 진짜 안방이 극장인 셈이다. 1960년대에는 남성 콘텐츠 위주로 편성이 되었다는 점도 특이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콘텐츠 흐름과 인기를 좌우하는 것이 여성임을 깨닫기는 했을 것이다.

3. TV방송 초기 비주얼형 가수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TV방송 초기, 그러니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우리나라 방송 프로그램은 대부분 예능이었다.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쇼 프로그램 아니면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스탠딩 개그를 하는, 그러니까 미국의 예능 프로그램을 본뜬 쇼들이 많았다. 아울러 TV방송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비주얼형 가수들, 댄스 가수들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노래를 잘 하는 것이 가수의 가장 큰 덕목이었다면 이제는 노래만이 아니라 외모와 댄스 실력까지 갖추어야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 최고의 TV스타는 단연코 패티김이었다. 노래는 기본이고, 비주얼이 일단 기존의 가수들과는 확, 차별화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당시 방송에 나오는 가수들은 전부 한국이었고, 한국 사람이 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미8군 무대를 그대로 안방으로 옮겨놓은 것 같은 그런 무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패티김이 출연해서 영어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책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2’, 강헌 저)

1990년대 댄스 가수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노래 실력은 약하고 외모와 춤만 뛰어난 비주얼형 가수가 득세한다고 걱정하는 평론가들의 글이 종종 소개되곤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만의 일은 아니었다. 1960년대에도 그와 같았다. TV라는 미디어 속성 상 어쩔 수 없는 일인 듯싶다. 당당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갖춘 패티김이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다. 물론 패티김은 비주얼뿐 아니라 가창력까지 뛰어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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