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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항상 정치인들에게 당하는 이유 3가지

올해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마도 선거에 대해서였을 듯싶다. 과연 선거로 선출된 사람은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혹시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떻게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을까? 반대로 선출되어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은 국민들 위에 부지불식 간에 군림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 있다. 2016년, 민주주의, 그리고 투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간을 가져보자.

1. 모든 군주들은 국민의 나태함을 이용한다.

“일상의 편리함이나 습관과 반대되는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하기에 또한 힘들고 까다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의 나태는 무기력함과 결합하여 사람들을 예속 상태에 묶어 둔다. 나를 대신해 생각하고 결정하고 통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군주들은 이 나태함을 이용한다. 국민들은 한때 민주주의 체제를 쟁취했다. 그러나 이랬던 국민은 이제 몇몇 소수자에게 책임감이 아닌 국민을 대신할 수 있는 결정권을 내주었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이쯤에서 칸트가 했던 말을 다시 인용하자. 민주주의란 인간을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동 출구가 아니다. 예속 상태에 머물게 된 것은 인간들 자신의 책임이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다수가 원칙에 따라 항상 좋은 선택을 한다고 인정할 수도 없고, 다수가 선택한 당선자들이 진정으로 다수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없다.”(책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장 폴 주아리 저)

민주주의 국가를 달성했다고 모든 것이 완료되지는 않는다. 국가의 주인으로서 쉴 새 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의 정치인, 권력자에게 이용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태해서는 안 된다. 부단히 공부해야 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특히 투표로 인해 뽑힌 사람들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거 제도를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 시스템을 지나치게 믿어서도 안 된다.

2. 투표로 당선된 자에게 절대 권력까지 주었나?

“권력을 양도해야만 특정인들에게 업무를 위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당선자들에게 권력을 양도하지 않고서도 업무를 맡길 수 있다는 말이다. 수로는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며 따라서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 국회의원은 단지 법이 정한 바를 실행하는 국민의 대리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은 이러저러한 결정 사항이나 법의 실행을 담당하는 개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국민과 국민 사이를 이어줄 매개자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모든 국민이 즉극적이고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없으므로), 이 매개자가 그 스스로 자치권이나 독립성을 확보하려 하고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가 되어 국민의 대표라고 자만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 즉시 기만과 위선이 생겨나고 합법성은 파괴될 것이다. …. 대부분의 나라는 규율을 만들기 위해 대표권 체제(선거제이든 아니든)를 구축했고, 이러한 대표권 체제는 이 나라들을 규제하고 지배하였다. 때문에 루소는 “극소수의 국가들만이 법을 가진다”고 지적했고 “대표자를 구하는 순간 국민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으며, 국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심각하게 덧붙였다.”(책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장 폴 주아리 저)

우리나라 대통령은 제왕적 권한을 휘두를 수 있다고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삼권분립을 채택했지만 제대로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특히 국회에서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 다수당을 차지할 경우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한다. 물론 국회의원도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 이들은 국민에게 권력을 양도받은 것이 아니다. 단지 업무를 위임 받았을 뿐이다. 선출된 권력들이 대표임을 내세워 자만하지 않기를, 스스로의 한계를 정확히 알게 되길 바란다.

3. 정치의 유일한 진리는 시민이다.

“정치에서 말하는 사유의 대상은 국민일 수 있다. 즉, 사유하는 국민이 정치의 사유 대상이 되므로 결국 대상과 국민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진리는 국민들이 스스로 하는 행동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어떠한 개인도 어떠한 정치 이론도 이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진리는 역사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진리가 국민 개개인보다 앞서고 국민 개개인 위에 있다거나, 이미 정해진 모델이나 계획 혹은 이상형에 국민들을 종속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반대로 국민들에게 이들 형식이나 계획, 혹은 이상형을 종속시킬 수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나라의 국민에게 한 가지 길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여러 길의 교차로’라는 이미지(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는 어떤 경우에도 타당성이 없다. 이는 교차로에서 서 있는 국민이 그 중에서 선택하게 될 하나의 길이 이미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하나인 것은 우리가 직접 걸어 보기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 시골 평야에서도, 인류 역사에서도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길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민과 시민 개개인은 자신들의 미래를 자유롭게 건설하는 창조자가 되고, 이때 미래는 그 자체로 정치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진리가 된다. 따라서 진리란 항상 어떤 결과이다.” (책 ‘나는 투표한다, 그러므로 사고한다’, 장 폴 주아리 저)

국민 또는 시민의 실천으로 인해 정치적 진리는 존재한다. 누구도 진리라며 강요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하지만 과거부터 각종 사상들은 자신들이 진리임을 강요했다. 이론은 실천을 억누르려고 했다. 그렇지만 국민 또는 시민의 실천 속에 진리가 있다. 퐁티의 말에서 다시 한번 그것을 느껴보자. “진리와의 관계 맺음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다른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진리로 가고 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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