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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플레이 리스트

  • 김도훈
  • 입력 2016.09.28 09:40
  • 수정 2017.09.29 14:12
ⓒASSOCIATED PRESS

이건 일종의 연상작용이다. 나는 어떤 기사를 보고나면 그에 들어맞는 가사를 가진 노래를 듣는 버릇이 있다. 며칠 전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거야(巨野)의 횡포를 막겠다"며 단식투'정'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보면서는 80년대 밴드 티어스 포 피어스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라는 곡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딱 맞아 떨어지는 곡은 아니다만 "모두가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한다"는 가사와 슬쩍 우울한 분위기가 어쩐지 지금 한국의 국회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헤어졌을 땐 슬픈 노래를 듣는다. 데이트를 앞두고 있을 땐 사랑 노래가 어쩐지 귀에 꽂힌다. 시위 현장을 지나칠 때는 저절로 몇몇 노래의 리스트가 흘러나올지도 모른다. 나는 시위 현장을 보는 순간 절로 '가자 노동해방'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읊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다. 가사를 프린트해서 나눠주며 외워두라고 했던 오래 전 92학번 선배 덕이다. 그 노래보다는 '아침이슬'을 먼저 외우게 했더라면 2016년의 내 흥얼거림이 조금 덜 투쟁적이고 더 로맨틱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여하튼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즐겨 듣는 노래는 어느 정도 당신이라는 인간의 특징을 말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한겨레'는 각 대통령이 즐겨듣던 곡 리스트를 기사로 만든 적이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이승만은 '타향살이'를 좋아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년에/청춘만 늙고"라는 가사는 확실히 한강 다리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던 그의 고뇌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에게 '타향'이란 미국을 떠나 살았던 한국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도 싶다. 박정희는 직접 작사한 '새마을 노래'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사실 그가 진짜 좋아했던 노래들은 젊은 시절 듣던 일본 엔카들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전두환은 '방랑시인 김삿갓'을 좋아했다는데 "세상이 싫던가요/벼슬도 버리고/기다리는 사람없는/이 거리 저 마을로"라는 가사가 대체 어떤 마음을 반영하는지는 모르겠다. 알고 보면 그의 내면에는 세상이 싫어서 백담사 같은 데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남자가 언제나 들어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노태우와 김영삼은 공히 '아침이슬'을 좋아했다. 두 사람이 같은 곡을 좋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한국 정치 역사상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김대중은 근사하게 지역적인 '목포의 눈물'을 좋아했다. 노무현은 이정원이 부른 '작은 연인들'을 좋아했다.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언제 우리가 헤어졌던가/만남도 헤어짐도 아픔이었지"라는 가사를 울컥하는 마음 없이 듣긴 힘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은 '만남'이 18번이었다. 가히 그렇다. 그와 국민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잘 따져보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국민의 '바람'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기서 조금 헷갈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이지 업데이트가 빨라서 비교적 최근 노래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며 요즘 즐겨듣는 노래 하나를 공개했다. 윤상의 '달리기'라는 노래다(후에 SES도 리메이크했다). 가사가 꽤 의미심장하다. "지겨운가요/힘든가요/숨이 턱까지 찼나요/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버린 것을"이라고 읊조리는 다짐의 노래이며, "이유도 없이/가끔은 눈물나게 억울하겠죠/단 한가지 약속은/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이라고 되뇌이는 항변의 노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은 '비교적 젊은 곡'을 빠르게 습득하고, 노랫말을 통해 위로받으며, 나아가서는 노랫말로부터 국정 운영의 어떤 실마리를 찾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연구팀은 얼마전 특정 음악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했다. 감정 이입을 잘하는 '공감형 인간'은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을 선호하며,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체계형 인간'은 음파가 복잡한 음악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그걸 강화하는 음악을 선택한다. 연구의 결과로 해석해보자면 박근혜 대통령은 요즘 지겹고 힘들고 눈물나게 억울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은 절대로 멈춰서지 않을 생각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대통령에게 노래를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꼭 추천하고 싶은 노래는 난해한 가사로 유명한 아이돌 그룹 f(x)(에프엑스)의 'NU 예삐오'다. "독창적 별명 짓기/예를 들면 꿍디꿍디/맘에 들어 손 번쩍 들기/정말 난 NU 예삐오." 캬. 나는 이 노래가 f(x)라는 그룹의 '해체주의적' 가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해체주의적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해체주의적 어법으로 잘 알려진 박근혜 대통령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을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이유가 어딨냐고? 사실 고백하자면, 어떤 노래를 대통령에게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없어 간절하게 고민했더니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듯이 f(x)의 곡이 떠올랐다. 이 글 전체를 다 읽어보고 노래를 들어보면 당신에게도 분명 그런 기운이 올 것이다. 내가 그것은 분명히 잘 알겠다.

*이 글은 한겨레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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