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르코스의 주인공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들을 단독 인터뷰하다

  • 박세회
  • 입력 2016.09.26 14:15
  • 수정 2016.09.26 14:16

세바스티안 마로킨은 1977년에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콜롬비아 역사상,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약상 '파블로 에밀리오 에스코바르 가비리아'의 장남이다.

에스코바르는 1993년 12월에 콜롬비아의 산악 지대 안티오키아 주의 주도 메데인의 거리에서 경찰과 추격전을 벌인 끝에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콜롬비아 군인들이 그를 죽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약 단속반과 손을 잡은 라이벌 카르텔 단원들이 그를 살해했다는 설도 계속 돈다. 마로킨은 언론인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다. 그는 즉시 전국 생방송으로 보복을 맹세했다. “나는 그 개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 내가 직접 죽이겠다.” 당시 그가 했던 말이다.

에스코바르가 죽었을 때 마로킨은 16세였다. 그가 에스코바르의 뒤를 이을 거라고 예측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과거의 증인들은 마로킨이 아버지의 책임을 떠안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로킨의 저 유명한 발언 때문에 그는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가서 새로운 이름을 써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마로킨은 그런 말을 했던 걸 후회하며, 지금 자신은 ‘평화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아버지가 ‘강도’였으며 콜롬비아와 자기 가족에게 많은 피해를 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어린 시절 나를 돌보던 사람들은 콜롬비아 최악의 범죄자들이었죠."

지금 마로킨은 건축가이며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다. 그는 세계를 돌며 아버지에 대한 강연을 한다.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아버지의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가 넷플릭스의 히트작 ‘나르코스’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에스코바르가 죽은 지 23년이 지난 지금, 마로킨은 아버지의 전설에서 이득을 얻고 있다. 그는 ‘내 아버지의 죄 Sins of My Father’(2009)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했고, ‘파블로 에스코바르: 내 아버지 Pablo Escobar: My Father’라는 책을 냈으며 의류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전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다.” 그의 말이다.

마로킨이 허핑턴포스트 스페인과 함께 그의 아버지, 콜롬비아에서의 평화 협정, 악명 높은 마약왕의 아들로 산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그의 아내 그리고 1999년 당시의 세바스티안 마로킨.

모두 당신을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 마로킨은 어떤 사람인가?

= 마로킨은 콜롬비아 인이다. 폭력에 의해 난민이 된 다른 5백만 명의 콜롬비아 인들과 마찬가지로, 삶과 교육에 대한 권리를 다시 얻기 위해 정체성을 바꿔야만 했던 사람이다. 나는 건축가, 사업가, 평화의 사람이자 아버지이다. 그것이 세바스티안 마로킨이다.

세바스티안 속에 후안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얼마나 있나?

= 100%. 이름만 달라졌을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문서. 절차. 내 신분증이 바뀌었다는 것은 내 아버지와의 관계나 아직도 내가 품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우리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해준 도구에 불과했다.

당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당신은 가문의 대변인 자리를 확고히 했다. 이유는?

= 내가 선택한 일이다. 다른 길을 고를 수도 있었다. 완벽히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고, 더욱 나쁜 선택을 했다면 파블로 에스코바르 2.0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건축,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평화, 화해, 용서를 선택했다. 최근 몇 해 동안 나는 내 삶을 여기에 바쳐왔다.

아버지가 주신 최고의 조언은?

= “용기는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약에 대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독을 팔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아들인 내가 마약을 시도하지 않길 바랐다.

카르텔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 나는 강도들 틈에서 자랐다. 내 베이비시터들은 콜롬비아 최악의 범죄자들이었다. 나는 이제 평화의 사람이다. 그들에게 그렇게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자초한, 또 다른 여러 콜롬비아 인들에게 불러온 고통에 대해 잘 알았던 것 같다. 내가 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비치는 거울과도 같았다.

당신과 마약의 관계는 어떠한가?

= 존경하는 관계이다. 마약은 콜롬비아와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 걸쳐 큰 피해를 주었다. 일부 마약만 금지되어서 전쟁, 부패, 인권 침해가 일어났다. 시장에 의해, 권력욕에 의해 더 심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 상황은 그대로다. 모든 게 온전히 남아있고, 지금도 완전히 똑같다. 불법 거래 업자들이 살해 당하거나 잡혀도 사업은 잘 돌아가고 있다.

북미인들은 모든 걸 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가끔 생각하는데, 마약 유통은 무기나 강력한 단속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드라마다. 그런 접근을 택할 경우 확실한 것은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뿐이다.

당신은 아르헨티나에서 어머니와 함께 2000년에 체포되었다. 마약 자금을 돈 세탁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나중에 무죄로 풀려났다. 어머니는 거의 2년 가까이 복역하셨다. 그게 아버지 사망 이후 가장 힘든 때였나?

= 사실 우리는 그런 대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때는 힘들었다. 콜롬비아를 떠난 지 5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부를 마쳤다. 나는 프로였고 힘들고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전혀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아들 같지 않은 삶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에 포위 당하고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어차피 감옥에 갈 거면 착하게 사는 게 의미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좋은 행동에 대한 상이 감옥인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신의 아버지는 큰 재산을 모았고, 사후에 여러 부동산이 콜롬비아 정부로 넘어갔다. 폐허가 된 건물들이 많지만, 이젠 테마 파크가 된 아시엔다 나폴레스 등은 민간 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 정치인들이 아닌 피해자들에게 가야 한다.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재산이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수사를 해야 한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피해자 중 단 한 명도 콜롬비아 정부가 몰수한 돈으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장담한다. 그저 정치인들의 손에 남았다.

정부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모두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을 얻으려고 조폭들처럼 싸웠다. 그 전쟁에서 이긴 쪽은 진 쪽의 돈을 다 가져갔고,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아직 당신에 대한 감정이 복잡한 것 같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며 콜롬비아를 위협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 그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고통과 절망에 빠져 했던 행동이다. 사람들은 내가 그에 이어 10분 뒤에 했던 두 번째 약속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교육을 받고, 내 가족의 교육과 내 나라의 평화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해온 일이 그거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20년도 더 전에 내가 했던 위협만 기억한다. 그 동안 내내 바르게 행동해 온 것은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 위협을 행동에 옮길 수 있었나?

= 그렇다. 그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여동생처럼 내가 내 행동에 책임을 지지 내 아버지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품을 수도 있는 복잡한 감정을 넘어서, 지금의 나는 약속이 아니라 사실을 가지고 말한다. 내가 아버지의 행동에 책임을 졌을 때는 화해를 찾기 위한 맥락에서였다. 나는 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넘겨받았다. 아무도 받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평화의 사람이고 그건 입증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당신은 화해는 보통 콜롬비아 문화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신의 책에서 당신은 당신과 어머니가 다른 카르텔들과 화해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썼다. 콜롬비아는 FARC 반군과 평화 협정에 서명해서 효과적으로 또 하나의 분쟁을 끝냈다. 당신의 경험으로 볼 때 이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 평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내가 협상해야 했던 평화처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평화는 우리가 콜롬비아의 모든 마약 카르텔들과 한 화해다. 나는 그 경험에 기반해 콜롬비아 인들이 화해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장 잔인한 사람들조차 폭력과 전쟁에 지친다.

우리는 완전히 불평등하고 불리한 조건에서 평화를 협상했다. 그런 불리한 임장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얻어낸 평화를 가치 있게 생각했고 논센스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 대가로 얼마를 치른다 해도 평화는 언제나 싸다.

콜롬비아 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고, 국가가 평화 속에 성장하고 살고 발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몰랐다. 우리는 50년 이상 서로를 죽여왔다. 콜롬비아의 사전에 화해란 없었다. 콜롬비아의 문화의 일부가 아니었다. 절차에 대해서는 수천 가지의 주장이 있겠지만, 화해는 쉽지 않다. 전쟁은 겁쟁이들을 위한 것이고, 평화는 용감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당신의 아버지에 얽힌 전설이 많다. 사람들은 숨겨진 돈, 묻어둔 큰 재산, 그의 사망 당시의 상황, 그가 돈을 주고 산 괴상한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아버지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다 들어 보았다. 가장 사실 같지 않고 극적인 이야기들부터 진짜 이야기들까지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마 엘비스와 함께 계시며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노래 한 곡 연주해 봐요. 나를 위해 한 곡 불러줘요.”

*본 기사는 허핑턴포스트 ES의 'Next Story

Sebastián Marroquín, hijo de Pablo Escobar: "Tuve como niñeras a los peores criminales de Colombia"'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르코스 #파블로에스코바르 #국제 #스페인 #미국 #마약상 #마약 #넷플릭스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