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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에 실 가듯이

제재 만능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대북제재의 근본적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 붕괴론의 허상(虛像)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북한 엘리트 몇 명이 탈북했다고 해서 그것을 북한 체제 붕괴의 전조로 보는 것은 '희망적 사고'에 기댄 과잉·확대 해석일 수 있다.

  • 배명복
  • 입력 2016.08.31 09:40
  • 수정 2017.09.01 14:12
ⓒASSOCIATED PRESS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문제 해결은 문제를 문제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제재를 통한 북한 핵 문제 해결은 실패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솔직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핵 문제는 해결에서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북한이 지난주 신포 앞바다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쏘아 올려 동해로 500㎞를 날려 보낸 순간, 압박 일변도 북핵 대응은 실패로 판명났다. 북한은 SLBM 수중 발사 실험 착수 1년7개월 만에 기술적 난관을 대부분 극복하고 실질적인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SLBM 발사 성공으로 북한의 핵 위협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북한 핵과 미사일 능력은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하고 있다.

그동안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핵실험에 제재 결의로 맞서 왔다. 2006년 1차 핵실험에 대응해 통과시킨 1718호를 시작으로 올 1월 실시된 4차 핵실험에 맞서 나온 2270호까지 4건의 제재 결의를 채택했다. 특히 2270호는 유엔 70년 역사상 특정국에 대한 비(非)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강도 높은 제재였다.

그럼에도 북한은 도발을 멈추기는커녕 되레 강도를 높이고 있다. 단거리 미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중거리 미사일인 무수단을 3전4기 끝에 발사 성공시킨 데 이어 마침내 SLBM 발사까지 성공했다. 핵과 미사일 개발에 사용 또는 전용될 수 있는 모든 물자와 장비, 자금의 유입을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춘 안보리 결의 2270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전문가들은 결의 2270호에 대한 기대 자체가 과장됐다고 지적한다. 조동호 이화여대(북한학) 교수는 "이전 결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화된 것뿐이지 절대적으로는 그다지 강력한 게 아니다"고 말한다. 북한의 최대 수출품인 광물 수출을 금지하고 있지만 민생 목적으로 포장하면 허용된다. 제재 대상으로 열거된 기관이나 개인에 대한 제재도 여행금지나 해외자산 동결처럼 실효성 없는 조치에 그치고 있고, 노동력의 해외 파견이나 섬유류 수출 같은 주요 외화 수입원은 여전히 제재 대상에서 빠져 있다.

2270호는 중국과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 현재의 안보리 구조에서 합의 가능한 최대치라고 할 수 있지만 그나마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2270호 이행보고서 제출 시한을 넘긴 지 석 달이 다 돼 가지만 현재까지 보고서를 제출한 나라는 47개국에 불과하다. 193개 유엔 회원국의 76%가 아직 보고서조차 제출하지 않은 셈이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안보리 결의지만 회원국에 이행을 강제할 수단은 없다. 구멍이 뚫려 있는 데다 이행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이 안보리 대북제재의 현주소다.

압박 일변도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게 분명해진 이상 제재 만능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대북제재의 근본적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 붕괴론의 허상(虛像)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북한 엘리트 몇 명이 탈북했다고 해서 그것을 북한 체제 붕괴의 전조로 보는 것은 '희망적 사고'에 기댄 과잉·확대 해석일 수 있다.

바늘에 실 가듯이 제재는 대화와 짝을 이룰 때 결실을 맺는다. 쿠바·이란·미얀마 모두 장기간 제재에 시달렸지만 체제가 무너지진 않았다. 제재와 대화를 병행한 끝에 스스로 변화를 택했을 뿐이다. 제재 때문에 무너진 나라는 없다. 제제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순 없다.

안보리 결의 2270호도 대북제재와 동시에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대북제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북한의 핵 활동 동결과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맞바꾸는 데서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어 북한이 원하는 평화체제 전환과 우리가 원하는 북한 비핵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대화를 하자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게 지금 정부의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이 워낙 단호한 데다 누구라도 대화를 먼저 입에 올리는 순간 자신의 실책을 자인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대화의 물꼬를 터주는 수밖에 없다.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물론 쉬울 리는 없지만 지금처럼 압박 일변도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북한의 김정은에게는 임기가 없다. 느긋한 쪽은 오히려 그쪽일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임기는 1년반밖에 남지 않았다. 용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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