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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반지성주의

서울대 국제대학원의 이근 교수는 듣기보다 말하기 좋아하는 한국 꼰대 세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닥치고 따르라는 세상에 맞서는 힘'이란 부제가 달린 『도발하라』는 제목의 저서에서다. 그는 단군 이래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외국어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정보력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민주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2040세대'가 외국어도 잘못하고, 정보기술(IT)도 잘 다룰 줄 모르고, 정보 획득 능력도 훨씬 떨어지는 꼰대 세대로부터 "시키는 것이나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는 답답한 현실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불일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 배명복
  • 입력 2016.08.17 13:43
  • 수정 2017.08.18 14:12

말이 많아지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표다. 아닌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개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헤퍼진다. 경험에 비례해 하고픈 말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를 앞세우며 청하지도 않은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선다면 그건 십중팔구 늙었다는 증거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귀를 여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서울대 국제대학원의 이근 교수는 듣기보다 말하기 좋아하는 한국 꼰대 세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닥치고 따르라는 세상에 맞서는 힘'이란 부제가 달린 『도발하라』는 제목의 저서에서다. 그는 단군 이래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외국어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정보력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민주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2040세대'가 외국어도 잘못하고, 정보기술(IT)도 잘 다룰 줄 모르고, 정보 획득 능력도 훨씬 떨어지는 꼰대 세대로부터 "시키는 것이나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받는 답답한 현실에 우리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불일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 장벽 중 하나를 꼰대들의 반(反)지성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반지성주의 사회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다. 질문이 없으니 답이 없고, 답이 없으니 비판도 없는 사회다. 설사 비판이 있어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마는 사회다. 관행과 전통에 도전하는 지적인 사유가 용납되지 않는 닫힌 사회에서는 선한 우리 편과 악한 저편이 있을 뿐이다.

그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세력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각기 거래 비용과 도전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서로 반지성주의를 의도적이고 경쟁적으로 추구한 탓이라고 분석한다. 편을 갈라 적(敵)을 만드는 '정체성 정치'에 골몰하고, 이성적 논리보다 감성적 구호를 앞세우고, 인신 공격과 이미지 공격에 치중한 결과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에서 지배 세력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채택한 반지성주의 전략에 도전 세력도 똑같이 대응하다 보니 사회 전체가 반지성주의의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이다.

최근 개봉된 '터널'이란 영화 속 얘기다.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터널이 갑자기 붕괴되면서 승용차 운전자가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에 갇힌다. 구조 작업은 난항을 거듭한다. 운전자의 생존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진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언론의 관심도 시들해진다. 이런 가운데 신도시 건설에 맞춰 인근 터널을 개통하려면 발파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천성산 도롱뇽 때문에 터널 공사가 지연돼 국가적으로 큰 비용을 치렀던 사례도 제시된다.

구조대장은 "터널에 갇힌 것은 인간이지 도롱뇽이 아니다"며 반발하지만 그의 외로운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정부는 응답자의 절대 다수가 발파 공사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밀며 운전자 가족에게 발파 작업에 동의하라고 종용한다. 결국 피해자의 생존 여부가 최종 확인되지 않은 채 발파가 진행된다.

영화 속 상황이 실제로 벌어져 발파 작업에 대한 여론조사에 참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편 손을 들어줄 것인가. 한 사람을 위한 무망(無望)한 구조 작업 탓에 사회 전체가 경제적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 옳은가? 아무리 경제적 피해가 크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한 명의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은가?

대한민국 5160만 인구 가운데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지구촌 70억 인구도 마찬가지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생김새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생각도 제각각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없이 고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간 한 명 한 명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명과 다수의 경제적 이익을 대비시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대개 인간의 불행은 편을 갈라 반대편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극단적 사례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실패로 끝난 쿠데타를 빌미로 상대 진영의 씨를 말리려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나 무슬림의 입국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 후보의 시도가 위험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통합과 국론통일을 외치며 반대편을 불순세력으로 몰아 겁박하는 것이야말로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고, 국가적 불행의 씨앗이다. 한 명 한 명이 더없이 존귀한 인간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려는 시도만큼 반인간적이고 반지성적인 망동(妄動)은 없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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