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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무너지는 무게

건물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도 건물을 지었고 건설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자재의 사용을 줄이기도 했다. 물론 케냐에도 안전한 건물관리를 위한 규제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제도적인 안전장치들을 위반하면서 뇌물을 통해 단속을 피하는 방법으로 지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불법건물에 입주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대다수의 저소득층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지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 김태은
  • 입력 2016.05.31 11:18
  • 수정 2017.06.01 14:12

사고 현장의 구조작업/ 출처: AP Photo, Ben Curtis

지난 4월 29일, 나이로비(Nairobi)에서 또 건물이 무너졌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다. 큰 비가 내리는 우기에 종종 일어났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국제뉴스에 대서특필이 될 정도로 50명 이상의 사람이 죽고 실종되면서 그 규모가 눈에 띄게 컸다. 2014년 1월, 나는 연구와 관련된 목적으로 이번 사고가 일어난 나이로비 동쪽의 후루마(Huruma: 영어로는 mercy로 번역되는 스와힐리어의 자비)라는 동네를 자주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은 순식간에 이재민이 된, 무너진 건물에 살던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는 Huruma Social Hall (일종의 마을 회관과 같은 곳)을 찾느라고 고생을 좀 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 가는 곳이어서, 비록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글맵을 열어보니, 몇 개의 가게, 큰 길, 교회 및 학교 등을 제외하고는 텅텅 빈 공간처럼 보였다. 이정표가 될 만한 몇몇 장소들을 종이에 적고 대강의 지도를 그린 후 길을 나섰다. 하지만 마타투(Matatu: 미니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후루마로 들어가는 입구에 들어섰을 때, 나의 사전조사는 예상했던 대로 쓸모가 없었음을 확인했다. 길로 표시된 곳은 길이 아니었으며, 텅 비어 보였던 공간은 온갖 색깔의 빨래들로 덮인 콘크리트건물들과 시장, 그리고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구글맵이나 위치를 찾는 어플리케이션은 소용이 없다. 대신에 그 공간의 사람들이 '지도'다. 혼잡한 시장통에서 길을 잃고 허탕을 칠 뻔했던 나는 골목 구석에 있던 차파티(Chapati:케냐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인도식의 얇고 둥근 빵)를 굽는 가게에 들어가서 길을 물었고, 거기서 일하는 청년이 소개해 준 심부름을 하는 아이의 도움으로 겨우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이번 사고 직후, 국내외의 신문기사에서 후루마를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Low income estate)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읽었다. 슬럼(Slum), 즉 빈민가라고 설명하는 기사들도 몇 있었다. 가만 생각하니 후루마는 슬럼이라고 부르기도 뭣하고, 또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만 부르기도 좀 부족한 구석이 있다. 보통 케냐의 슬럼은 나무나 얇은 양철판 등으로 만든 단층의 판잣집들(케냐에서는 mabati house라고 부른다)이 늘어선 곳들인데, 후루마와 주변 지역에는 콘크리트로 지은 5층 이상의 주택용 건물들이 많다. 그런 주택구조 때문인지 후루마는 판자촌으로 그려지는 전형적인 슬럼들과 비교했을 때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콘크리트건물들의 유래를 살펴보면 후루마 역시 나이로비에 있는 대형 슬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인구밀집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비가 내리는 후루마 /출처: REUTERS, Thomas Mukoya

나이로비의 간단한 역사

나이로비는 영국인들이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우연히'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19세기 말, 동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인들의 최대 관심사들 중의 하나는 내륙의 '보석'으로 여겨졌던 지금의 우간다(Uganda)를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착취를 원활하게 만드는 교통수단이 필요했기에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시작하여 내륙을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이 철도 건설의 중간기착지가 바로 지금의 나이로비다.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곳(Enkare Naih'rrobai)'이라는 마사이(Maasai 또는 Masai) 표현이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알려진 이곳은 유목을 하는 마사이 사람들이 이동 중에 머무르거나 가축들을 위한 식수원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또 마사이 사람들과 주변의 농경 공동체들이었던 키쿠유(Kikuyu)나 캄바(Kamba)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고 혼인관계를 맺거나 또 다투기도 하면서 살아가던 그 가운데에 있던 지역이기도 했다. 1899년 당시 철도건설과 식민지 경영을 담당했던 대영제국 동아프리카회사(Imperial British East Africa Company)는 경사지대로 진입하기 전, 기후가 서늘하고 평평했던 이 지대에 건설본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불과 몇 년 사이에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 내륙과 해안을 잇는 식민지 경영의 요충지로 부상했고, 1905년에는 수도가 되기에 이르렀다 (Andrew Hake 1977; 참고1).

식민지 시대의 나이로비는 영국인들을 비롯한 유럽 출신 백인들만을 위하여 건설된 도시였다. 두 번의 도시계획에서 소위 아프리카인들(Africans)이라고 불리던 다수의 사람들은 거의 배제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위한 거주공간이나 상하수도 같은 기반시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백인들은 지대가 높고 배수가 원활한 서쪽(웨스트란즈 Westlands)을 중심으로 정원이 딸린 넓은 유럽식 저택들을 짓고 생활을 했지만, 아프리카인들은 도심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키판데(Kipande)라고 불리는 16세 이상의 남성 아프리카인들이 의무적으로 발급받았던 고용 및 신분증명서와 같은 서류가 담긴 작은 철통을 착용하고 다녀야 했다 (R. Mugo Gatheru의 자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참고 2). 백인들에게 고용된 아프리카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인구에 비해서는 턱없이 좁아서 불도 자주 나고 침수가 빈번한 동쪽(이스트란즈 Eastlands)에 있었다. 이곳이 지금도 나이로비에서 빈곤층 및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극심한 인간체증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밀집해서 생활하고 있는 동네들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케냐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이로비로 상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들은 이 동쪽 지역에 판잣집을 짓거나 세를 들면서 부족한 기반시설과 씨름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당시에도 없었던 상하수도나 도로 등이 독립 후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무너진 6층 건물/ 출처: REUTERS, Thomas Mukoya

누구의 탓인가

단층의 판잣집 위주였던 이 동쪽 지역에 2층 이상의 건물들이 많이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후루마 지역의 주택을 연구한 한 학자는 이 유행의 근원을 정부에서 시작한 공공주택 개발계획에서 찾는다 (Marie Huchzermeyer 2011; 참고 3). 좁고 제한된 빈민가의 대지에 층수가 높은 건물을 지으면 주택난이 해소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계획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지어진 건물들이 임대주들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좁은 대지에 세입자들을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는 다층의 건물들을 지어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도 건물을 지었고 건설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자재의 사용을 줄이기도 했다. 물론 케냐에도 안전한 건물관리를 위한 규제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제도적인 안전장치들을 위반하면서 뇌물을 통해 단속을 피하는 방법으로 지어졌다 (관련 케냐 신문 네이션 기사). 그렇다면 이런 불법건물에 입주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대다수의 저소득층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지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다 지어지지 않은 건물의 1층과 2층에 들어가서 살기도 하고 돈이 부족해서 짓다가 중단한 상태에서도 사람들이 입주한다. 최근 나이로비에서 부동산 호황이 일어나고 많은 신규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이들은 대부분 중산층이나 고소득층을 위한 상품들이고 또 차가 없는 사람들은 다니기도 힘든 위치에 지어지고 있다. 소득이 낮은 사람들의 형편에 맞는 주택은 거의 지어지지 않고, 150군데 이상으로 알려진 크고 작은 슬럼들은 사방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개발에 갇힌 섬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들이 바로 이번에 무너진 건물들을 포함한, 셀 수 없이 많은 불법 건조물들이 지어지고 무너지는 배경이다. 맥락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경험하는 예고된 참사였다. 식민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주택난, 어중간한 개발계획, 정부의 부패, 그리고 안전을 뒷전으로 하는 이익추구 등이 구성하는 복잡하고 무거운 무게를 이기지 못한 건물들이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 직후, 건물주들은 구속되었고, 정부는 불법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문제의 뿌리는 그대로 있다. 철거대상 건물들에 살던 많은 가족들이 순식간에 집을 잃고 주변의 다른 판자촌들로 흡수된다. 어떤 이들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여 길을 떠돌지도 모른다. 한두 명의 누군가를 탓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건물의 잔해와 함께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지, 근본적인 문제들은 '다음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그냥 잊혀지는 것은 아닌지 씁쓸하다.

철거 대상 건물을 떠나는 사람들/ 출처: AP Photo, Ben Curtis

참고자료

참고1 Andrew Hake, African metropolis: Nairobi's self-help city, Sussex University Press; Toronto: Clarke, Irwin, 1977.

참고 2 R. Mugo Gatheru, Child of Two Worlds, Routledge & Paul, 1964.

참고 3 Marie Huchzermeyer, Tenement cities: from 19th century Berlin to 21st century Nairobi. Africa World Pres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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