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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사태와 댓글공작의 공통점

  • 임범
  • 입력 2018.06.05 11:57
ⓒ뉴스1
ⓒhuffpost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의 조사보고서를 봤다. 조사 대상이 된 문건들은 대다수가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작성해 차장에게 보고했고, 이게 차장 위 법원행정처장과 대법원장에게 보고가 됐네 아니네를 두고 말들이 엇갈리고 있는 것들이다. 한창 문제가 되는 ‘대법원과 청와대의 판결 거래 의혹’ 외에도 답답한 내용이 많았다. 섬뜩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참 찌질했다.

가장 많은 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방침에 반대 소리를 내는 법관들을 어떻게 할지 대처방안을 모색한 문건이다. 이미 나온 반대 목소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논의보다, 반대가 예상되는 모임, 인터넷 카페, 세미나 등을 해산 또는 무산시키거나 영향력을 줄이려는 ‘선제적 대응방안’(보고서의 표현)이 많다. 이런 걸 왜 굳이 문서로 만들었을까 싶은 게 태반이다. ‘반대편’에 대한 경계심은 잔뜩 드러내면서 그걸 실행할 방안은 빈약했다.

이런 식이다. 문건들은 반대편의 ‘근거지’로 판사들의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특히 이 연구회 안의 소모임인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지목한다. 인사모 핵심 회원에게 해외연수, 선발성 인사 등에서 불이익을 부과한다는 방안을 제시해 놓고는 ‘개별적이고 신중한 접근 필요’라며 판단을 유보한다. ‘행정처에서 인사모 폐지를 권고하는 것’ 또한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진다. 학술모임 중복가입을 제한하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원 수가 크게 준다며 감소 인원까지 계산해 놓았는데, 이건 실행됐다.

사법행정위원회의 주도권을 ‘반대편’에 넘겨주지 않을 방안,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회의 의장에 ‘자기편’을 당선시키는 전략 등도 용의주도하게 검토된다. 실행이 쉽지 않은 과격한 안을 적어놓고 부작용이 커서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단다. 그렇게 차포 떼고 나면 상식적인 방안 몇 개가 남았다. 찌질해 보인다는 게 이런 건데, 짧은 생각일 수 있다. 특별조사단이 확보하지 못한 다른 문건에는 실행에 성공한 다른 과격한 제안이 많을지 모른다. 또 이런 논의가 사법부 최고 행정기관에서 오갔다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분노를 사고 남을 일이다. 그와 별도로 자꾸만 내 눈에 띈 건 문건들의 어법과 표현이다.

한 문건은 “소수 핵심 그룹의 조직적 활동이 다수 일반 판사의 호응을 얻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사법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할 세 가지 인물 유형을 꼽았다. 그게 어떤 사람인지 알기 힘들었다. “법관사회에서 상징성이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법관”…. 정치적 생각이 정상적인 사람 정도를 떠올렸지만 막연했다. “정치적 색깔이 없으면서도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는 법관”…. 정치적 색깔이 없는 사람이 있나? 자기들이 내세울 사람을 설명한 건데, 갑자기 웃음이 났다. 혹시 작성자가 ‘이런 사람 찾아봐라, 어디 있는지’ 하는 심사로 써넣은 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우스개 같은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판사들이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다음 카페 ‘이판사판야단법석’에 ‘부장판사가 법정에서 낙서하고 딴생각 한다’ 같은, 밖에 알려지면 욕먹을 글들이 올라온 모양이다. 행정처 심의관 출신 판사가 행정처 간부와 협의해, 이 카페에 다른 판사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민감한 내용은 일정 기간 게시 후 자진삭제하자’는 글을 올렸다. ‘댓글공작’인 셈이다. 그러고보니 이 일련의 문건과 국정원 댓글공작 사이에 공통점이 보인다. 공론의 장에서 당당히 토론하는 대신 공론의 장을 억압하고,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과 사법부의 구성원인 법관을 조작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거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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