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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20년 여름 : 멈춰버린 밤 9시, 빗방울이 눈물처럼 마스크로 떨어졌다

김탁환 소설가의 특별기고문이다.

  • 이인혜
  • 입력 2020.09.04 17:21
  • 수정 2020.09.04 17:22
젊은이들로 북적였던 서울 마포구 홍대앞 거리는 상점도 대부분 문을 닫고 사람의 왕래도 없어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젊은이들로 북적였던 서울 마포구 홍대앞 거리는 상점도 대부분 문을 닫고 사람의 왕래도 없어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

 

건널목 앞에서 연인은 하나뿐인 우산을 편다. 커플 티처럼 노란 마스크를 쓴 채 두 눈을 맞추던 연인은 쉽게 걸음을 떼지 못한다. 밤 9시가 막 지났기 때문이다. 종종 가던 프랜차이즈 카페는 일찍 문을 닫았고, 단골 술집에선 손님을 받지 않는다. 새벽 5시까지 일반 음식점, 휴게 음식점, 제과점 내 취식 금지! 연인이 돌아서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간 뒤론 지나가는 이도 없다. 30년 넘게 홍대 앞 주차장 거리를 드나들었지만, 스산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처음이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농촌과는 달리, 이 거리의 밤은 낮보다도 밝고 뜨겁고 시끄럽기로 유명했다. 맘껏 먹고 떠들고 노래하고 또 맘껏 사랑하는 불야성(不夜城). 그러나 2020년 내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이곳에도 밤이 있고 고요가 있고 고독이 있음을 드러냈다.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익스트림 롱 숏으로 등장하는 도심의 폐허가 이와 같을까. 좀비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홀로 걸었다. 빗방울이 두 눈 아래에 붙었다가 눈물처럼 마스크로 흘러내렸다.

여섯번째 대멸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가 적지 않다. 다섯번까지의 대멸종은 화산폭발이나 소행성 충돌 같은 천재지변에서 비롯했지만, 여섯번째 대멸종의 원인은 바로 ‘인류’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광범위한 곳에서 짧은 시간에 감소하도록, 인류가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대멸종을 막기 위해 ‘지구의 절반’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도록 보전 구역으로 설정하자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생명의 터전을 지키자는 것이다.

홍대 정문을 등지고 내려간다. 네온사인 간판이 드문드문 빛나고 있다. 삼겹살에 소주로 저녁 식사를 마친 이들이 숯불구이 가게 앞에 둥글게 서 있다. 마지막 손님인 것이다. 겨울에만 해도 맞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생맥주로 입가심이라도 하려고 주변 가게를 수소문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마스크를 쓰곤 우산을 편 후 흩어진다. 형광등을 끈 가게엔 직원 둘이 마주 서서 테이블에 남은 음식과 식기를 빠르게 치워나간다. 때 이른 마감이 전혀 반갑지 않다.

“태풍은 왜 이리 자주 오고, 장마는 왜 이리 긴 걸까?”

고참이 날씨 탓을 하자, 신참이 소셜미디어(SNS)에 올라온 카드뉴스의 문장으로 답한다.

“장마가 아니라 기후 변화래요.”

“기후 변화?”

“바뀌었대요. 쨍쨍한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인류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기후 변화는 대멸종의 구체적인 징후다. 대기과학자 조천호의 주장에 따르면, 1만년 동안 지구의 온도는 4도가 올랐는데, 산업화 이후 겨우 100년 만에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으로 1도나 높아졌다.

크리스 조던 감독의 다큐멘터리 <앨버트로스>는 인류의 활동이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앨버트로스의 배를 가르자 수많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나왔다. 막대한 양의 해양 쓰레기가 북태평양 환류대에서 발견되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자연분해가 불가능한 플라스틱이다. 해수면에 떠도는 플라스틱을 먹잇감으로 여겨 삼켰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지구는 바뀌었다. 오로지 인류를 위한 행성으로! 인류에게만 이롭게 도시를 확장하고 도로를 뚫고 강을 막고 숲을 없앴다. 지구의 심각한 위기를, 난폭한 독주를 거듭해온 인류만 몰랐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거나 착각이라고 우겼다.

마지못해 대멸종과 기후 변화를 인정하더라도, 독주는 불가피하다는 핑계를 댔다. 근대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선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 더 빨리 더 많이 더 크게 갖겠다는 욕망은 생존의 문제를 넘어 신앙과 맞닿거나 인간 본성이라고까지 강변되었다.

9월3일 현재 코로나19로 세계 218개 국가에서 2570여만명의 환자가 발생하였고 85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내 현황은 확진 환자가 2만644명이고 사망자는 329명이다. 8월30일부터 9월6일까지 수도권은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실시하고 있다. 3단계 격상을 막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다.

2.5단계를 실시하고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편하고 답답할 뿐만 아니라 ‘코로나 블루’에 걸렸다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하던 일을 못 하고 가던 곳을 못 가고 만나던 이들을 못 만나니 낯설고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근대 이후 처음으로 흩어져 멈춘 채 고민할 여유가 강제로 생겼다.

멈춘 후에야 비로소 보이고 마침내 들렸다.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이들의 눈망울들, 소멸이 코앞이라며 무시당하는 지방과 농촌과 벼농사와 공동체의 풍경들, 다수의 횡포에 맞서는 소수의 목소리들! 지금까지 인류의 생산 방식과 소비 방식에 대한 본질적인 반성이 없다면,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은 코로나19 이후에도 다시 올 것이다. 지구를 더 이상 파괴하지 않고 회생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스와 메르스를 지나 코로나19까지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비롯한 인수 공통 전염병의 창궐은 인류가 야생동물과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탓이다. 영장류 생태학자 김산하가 주장하듯이, 야생동물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는 서식지까지 반드시 함께 살펴야 한다. 서식지를 없애며 침범해온 인류의 활동은 야생동물을 지속적으로 궁지로 모는 짓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도 문제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과밀이 기본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과 마주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수천명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수만명이 한 경기장에 모이는 것도 흔한 일이다. 좁은 지역에 많은 수가 모여 살다 보니, 모든 공간이 인간 중심으로 세밀하게 관리되었다. 들녘의 웅덩이나 강변의 습지처럼, 자연 생태계 보전에 중요한 곳들부터 노는 땅 취급을 받으며 자취를 감췄다.

더 먼 곳까지 더 많은 사람이나 화물을 더 빨리 옮기기 위한 경쟁 또한 치열했다. 그 방식이 낳은 최고의 발명품 비행기는 바이러스를 최단 시간에 지구 곳곳에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다. 코로나19로 비접촉의 일상이 이어지자 모바일을 통한 접속이 부각되었다. 인터넷 서점들은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배송을 마치는 서비스를 갖췄다고 다투어 자랑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대면 쾌속 서비스는 소비자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당일 배송이 가능하게 하려면, 주문한 책을 고르고 포장하고 배달하는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휴식이 불가능한 손이다.

과밀한 곳에서 과속으로 살아가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살필 겨를이 없다. 나만 안전하면, 나만 편리하면, 나만 즐거우면, 다른 존재의 생사나 처지 따윈 관심 밖인 것이다.

원룸이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든다. 편의점과 빨래방과 피시방과 분식점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았다. 1년 전만 해도 개학과 동시에 상경한 학생들로 골목 전체가 환했다. 반가운 인사와 진지한 고민과 신나는 농담이 가게 안팎을 흐르다가 원룸까지 옮겨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턱을 들고 아무리 살펴도 형광등을 밝힌 방이 한두 군데뿐이다. 대면 강의가 온라인 원격 수업으로 바뀌는 바람에 학생들이 상경하지 않은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살피니, 폐업하여 텅 빈 가게가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편의점 주인이 혀를 끌끌 찬다.

“1학기는 어찌어찌 넘겼지만 2학기까지 이러니 두 손 두 발 다 든 거죠. 월세 낼 날은 꼬박꼬박 돌아오는데, 학생들이 돌아올 날은 기약이 없으니까요. 천하장사라도 못 버텨요. 힘들어 죽겠어.”

코로나19로 어지러운 봄에 섬진강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두 시간을 줄곧 강을 따랐지만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없었다. 길을 걷다가 자주 멈췄다. 새소리를 듣고 버드나무 군락지의 물오른 초록빛을 사진에 담고 긴 혀를 날름대는 소들의 똥 냄새를 맡고 논두렁으로 잠시 올라가 여린 모도 어루만졌다.

농촌에선 매일 만나는 존재들이지만, 도시에선 어울리기 어렵다.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과 나무와 곡물까지도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년 남짓 책을 쓰면서 자주 만난 농부는 벼를 논 사람이라 하고 나무를 숲 사람이라 했다.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고 나니 강변의 마을들이 더더욱 아름다웠다.

여름 수해로 섬진강 제방이 무너졌을 때, 나는 봄에 만난 생명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슬펐다. 만인의 고통을 넘어 만물의 고통을 내 문장으로 옮기고 싶었다. 공장식 축사의 닭과 돼지들에게로 마음이 움직였다.

그들에겐 평온한 서식지가 단 한순간도 허락되지 않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로지 식자재로만 취급당했다. 근대 문명의 시스템이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현재를 바꿀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체념이다. 그 체념이 코로나19를 만들었고 대멸종을 앞당겼다.

확진 환자가 줄어들면 사회적 거리두기 2.5는 끝나고 강제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다음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과밀과 과속의 나날로 다시 익숙하게 돌아갈까. 강제로 멈춰 있는 동안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차원이 다른 자발적인 멈춤을 시도할까.

산책의 기쁨과 자전거의 정겨움은 케이티엑스나 비행기의 편리함으로 대체할 수 없다. 다른 속도로 다르게 나아가야지만 다른 아름다움을 만난다. 더 빨리 갈 수 있어도, 더 많이 가질 수 있어도, 더 크게 만들 수 있어도, 더불어 사는 이웃의 형편을 살펴 적정함을 유지하는 것, 그들과 함께 번민을 나누고 행복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장일순에서 시작하여 김종철로 이어진 ‘사람과 생명한테 잘하고 살자’는 환대의 정신이다. 코로나19 이후의 대전환에 관한 거창한 제언이 쏟아지고 있지만, 나는 이 평등과 공생의 다정한 눈길에서부터 새로운 마을을 꿈꾸고 싶다.

어두운 골목을 걷다 보니, 연남동 경의선숲길 공원에 이르렀다. 이곳 역시 음식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벤치에 앉아 밤공기를 즐기는 청춘도 없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젖은 채 반짝이는 가로등 아래 서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에 발표한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 13항을, 가만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웠다. “인류는 여전히 우리의 공동의 집을 건설하는 데에 협력할 능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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