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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5세에 할머니가 될 줄은 몰랐다. 내 삶은 이렇게 달라졌다.

순식간에 손주가 5명 생겼다

필자와 손주
필자와 손주 ⓒCOURTESY OF JILL DUTTON

“아기가 아기를 가졌어요!” 내가 18세 때 어머니가 계산원에게 했던 농담이다. 우리는 내가 입을 임산부용 옷을 사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는 아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난 계획을 세워두었다고 생각했다.

내 첫 직장이었던 식당 레드 랍스터에서 16세 때 래리를 만났다. 나는 서빙을 했고 래리는 주방에서 일했다. 그때 래리는 20살이었고 친구들과 같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고 불과 1년 뒤에 결혼하기로 했다. 우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는 동거부터 하길 바랐다. 하지만 구식인 아버지는 결혼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래리와 나도 결혼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17세였고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같이 법원에 가서 서명했다.

모든 게 정말 빨리 일어났다. 결혼 후 6개월 뒤, 나는 임신했음을 알게 되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자연스러운 진행 같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래리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역시 나만큼 신나 했다. 모두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18세 때 딸 크리시를 낳았다. 3년 뒤인 21살 때는 둘째 딸 타라를 낳았다. 내가 젊은 나이에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함께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1번째 생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듯 나가 놀면서 술에 취하는 대신, 깜짝 생일 파티에서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딸기 다이키리를 홀짝였다.

우리가 젊기 때문에 아이들과 남편, 나는 더 많은 것을 함께 보고 같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우리는 딸들을 데리고 캠핑과 낚시를 다녔고 수공예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그러나 희생은 있었다. 내 친구들이 연애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바에 가고, 늦게까지 깨어있고 위험 부담을 감수할 때, 나는 혼자 아파트에서 산통을 겪으며 산후 우울증 때문에 훌쩍였다. 그때 내 남편은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했다.

하지만 그건 내 선택이었고 나는 어머니가 된 것이 정말 좋았다.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힘들었지만, 젊었을 때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금도 내 딸들은 내게 일어났던 최고의 일이다.

래리는 훌륭한 아버지였지만(지금도 그렇다) 열심히 일했고 우리가 결혼했을 때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둘째가 2살이 되었을 때 이혼했고 친구로 남았다. 명절을 함께 보내고 공동 친권을 갖고 있으며, 딸들에게 최선인 일을 하려고 애쓴다.

나는 재혼해서 10년을 살았다가 딸들이 10대가 될 무렵 두 번째로 이혼했다.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텅빈 둥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내가 10대였을 때 이후 처음으로 싱글이 되면 과연 어떨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내 앞에 놓인 자유에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내게 방랑벽을 심어주었다. 내가 늘 하고 싶었던 기차 미국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신이 났다. 내 마음대로 살 기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탐험하고 싶었다. 조금은 제멋대로 지내고 싶었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좋은 어머니이자 아내가 되겠다는 결심이 굳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낼 기회를 그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다.

딸들이 어렸던 내 20대 후반에 나는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똑똑하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는 평생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를 겪었지만, 수업을 빠지고 말썽을 일으키던 고등학교 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대학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난 내 잠재력을 모르고 있었다. 초기 미국 문학을 사랑하게 되었고, 읽기나 쓰기가 동반되는 모든 수업이 다 좋았다. 나는 지역 매체들에 기고하기 시작했고, 캔자스 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며 ‘진화하는 여성’(Evolving Woman Magazine)이라는 잡지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딸들이 10대일 때는 바빴지만, 나로서도 성장하는 기간이었다. 아이들이 집에서 나가서 살게 되면 자아 탐구에 몰두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누리지 못했던 독립적 세월을 아직 젊고 건강할 때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토록 빨리 할머니가 될 계획은 없었다.

내가 35세 때 16살이던 딸 크리시가 임신했다. 나는 크게 낙담했다. 크리시의 삶이 나의 삶처럼 미뤄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본 다음 곧바로 대학에 들어가라”고 조언했다.

크리시는 재능이 있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밟고 있었다. 우리는 크리시가 대학을 다닌 다음 번역가로 기업에 취업할 거라고 기대했다. 아이가 생기자 모든 게 달라졌다. 크리시의 학교는 임신한 학생들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아기를 데리고 등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 어린이집에서 자원봉사하기 위해 언어 프로그램에서는 빠져야 했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희생이었다.

크리시는 내 충고를 듣지 않고 임신 중에 대학 교육을 시작하기로 했다. 동급생들과 함께 졸업하는 게 크리시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학년 때는 책, 아기, 기저귀 가방을 들고 등교했다.

크리시의 아들 제이슨이 태어난 것은 내가 35세 때였다. “나는 할머니가 될 정도로 나이들지 않았어!”라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외쳐댔다.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 때문에 크리시와 나 사이에 마찰이 많이 생겼다. 크리시는 내가 전형적인 돌봐주는 역할을 하길 바랐기 때문에 외적인 갈등이 있었고,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해결하느라 내 내면에서도 갈등이 생겼다. 크리시는 내가 육아를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밤에 먹을 것 주기, 배변 훈련, 가정을 꾸리는 법을 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나는 나쁜 할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손주를 돌보는 게 의무로 느껴지는 동시에 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나는 전형적인 할머니가 아니었다. 내 나이 때문에 할머니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길러진 방식 때문에 할머니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내 어머니가 할머니가 될 때도 마뜩찮아 했던 게 기억난다. 어머니는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걔들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 말을 지켰다. 어머니는 내 아이들을 봐준 적이 없고 나 역시 어머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탁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내 아이들이 여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기꺼이 데리고 다니며 즐거워했다. 내 딸들은 내 어머니를 할머니라기보다는 친구로 생각했다.

내가 내 어머니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꿋꿋이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반면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당시 만나던 카운슬러에게 내가 자연스러운 갈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좋은 할머니가 될 수 없을 거라고 우겼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런 종류의 할머니가 아닌 것뿐이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지금 있는 유일한 할머니 롤 모델은 전형적인 할머니가 아닌 할머니 뿐이었다. (나는 자라며 내 할머니와 별로 자주 만나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전형을 깨는 게 괜찮은데 내가 하면 안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내 아이들을 사랑했고, 내 아이들의 아이들도 사랑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크리시는 23세 때 케이틀린을, 25세 때 브루크를 낳았다. 타라는 24세, 26세 때 두 아들 대니와 앤드류를 낳았다. 나는 순식간에 손주가 5명 있는 할머니가 되었다.

내 손주들을 중심으로 한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카운슬러의 말 때문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책임졌고 내 손주들과 나는 우리에게 진실된 방식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다른 여성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제 50대이지만 아직도 할머니라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손주들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우리만의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탐험하고 여행하면서 손주들과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게 균형을 맞추는 건 아직도 쉽지 않다. 이번 달의 경우 4주 동안 여행을 3번 갈 예정이다. 손주 중 2명이 그중에 생일을 맞는데, 아마 내가 없는 동안일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지만, 나를 먼저 선택할 때가 있다고 해도 손주들에 대한 내 사랑이 덜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느낀다.

내 어머니가 그랬듯,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할머니가 되었다. 빵을 굽고 수공예를 하는 등 딸들과 즐겼던 일들을 이제 손주들과 한다. 이젠 베이비시터가 없어도 되는 나이라서, 우리만의 함께 지내는 방법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손주 양육을 돕기 위해 모든 걸 내거는 영화 속의 할머니가 아니다. 나는 손주와 함께 있을 때는 사랑을 주면서도 자신의 삶을 최대한 살아가는 할머니다. 나는 만족스럽다. 손주들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나를 친구에 가까운 존재로 기억하길 바란다. 나는 할머니가 되기엔 너무 젊으니까.

 

* HuffPost US의 I Never Imagined Being A Grandmother At 35. Here’s How It Changed My Life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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