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보거라, 우리들의 연대를” 극장가 이끄는 '을의 서사' 영화 2선

판타지스러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현실적인 ‘젊은이의 양지’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코로나19 사태로 억눌린 마음이 투영돼서일까? 지금 극장가는 ‘을의 서사’가 이끌고 있다. 특히 ‘을의 반란’을 그린 영화가 답답한 가슴을 사이다처럼 뚫어주며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2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지난 주말 이틀 동안 30만5268명의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지난달 21일 개봉 이후 12일째 정상을 지켜오고 있다. 개봉 첫 주말 관객 수가 21만8663명이었던 걸 고려하면, 뒤로 갈수록 관객이 느는 모양새다. 누적 관객 수는 93만1714명으로, 1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1995년을 배경으로 삼진그룹 8년차 베테랑 말단 사원 이자영(고아성)·정유나(이솜)·심보람(박혜수)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상고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한 지 8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커피 타기, 서류 정리, 영수증 입력 등 단순 업무를 반복한다. 참신한 마케팅 아이디어를 내도 대졸 사원이 가로채기 일쑤고, 정작 그 아이디어를 논하는 회의 자리에 햄버거나 사다 나르는 처지다. 위계질서가 철저한 조직 안에서 ‘을 중의 을’인 셈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판타지 결말로 대리만족 선사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관객들은 25년의 시차를 넘는 공감대를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씨지브이(CGV) 등 관람객 평에는 “95년도면 내가 초딩 땐데 지금이나 그때나 직장 생활은 다 똑같구나” “요즘 제 회사 생활을 보는 것 같았어요” “인턴 하는 제 모습도 살짝 보였네요”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이 영화의 힘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졸 사원 삼총사는 회사 공장에서 유해물질 페놀을 하천에 무단 방류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고발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회사를 삼키려는 검은 세력의 음모를 알아채고 이에 맞선다. 약자들의 무기는 연대다. 이들은 사내 고졸 사원들과 힘을 합쳐 회사를 위기로부터 지켜낸다. 현실에선 보기 힘든 판타지스러운 결말에, 답답한 세상에 짓눌려 있던 관객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며 환호한다.

젊은이의 양지: 암담한 현실 버티게 하는 한줌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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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젊은이의 양지> 스틸컷.

지난달 28일 개봉한 <젊은이의 양지>도 ‘을 중의 을’의 서사를 다룬 영화다. 다만 유쾌하고 판타지스러운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달리 암울하고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비정규직 문제, 청년 취업난, 유리천장으로 상징되는 직장 성차별 등이 스릴러 장르의 외피 안에 녹아들어 있다.

콜센터에서 카드빚 독촉 전화를 하는 19살 현장실습생 준(윤찬영)은 화장실 갈 시간도 없어 기저귀를 차고 일한다. 실적을 채우기 전에는 제때 퇴근도 못 한다. 어느 저녁 준은 연체자 집에 직접 돈을 받으러 갔다가 실종되고, 며칠 뒤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후 콜센터장 세연(김호정)에게 준과 관련된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도착한다. 세연이 불안에 떠는 동안, 그의 딸 미래(정하담)는 취업난에 몸부림친다.

영화 <젊은이의 양지> 스틸컷.
영화 <젊은이의 양지> 스틸컷.

영화가 그리는 현실은 그야말로 지옥도다. 준과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갑’처럼 보이는 세연도 알고 보면 ‘을’의 처지다. 센터장이라 해도 실적이 떨어지면 언제든 정리 대상에 오르는 계약직 신세다. 퇴근 뒤 장을 보다가도 본사 상무가 술자리에 부르면 달려가야 한다. ‘을’이 또 다른 ‘을’을 쥐어짜내는 구조 안에서 이 시대 청년들에게 ‘양지’는 아득하기만 하다. 신수원 감독은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19살 비정규직 청년의 이야기를 접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보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영화는 막판에 세연의 행동을 통해 한 줌 위로를 전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처럼 통쾌하진 않아도, 지금 이 어두운 터널을 버티며 지나갈 힘을 준다. 상반된 분위기의 두 영화지만, 이 시대를 묵묵히 견디는 ‘을’들의 손을 잡아준다는 점에서 둘은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