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2월26일 대통령 재임 시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서울지법(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앉은 전두환씨가 김성호 당시 서울지검(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 검사의 신문에 이렇게 답했다. 전씨는 1982년부터 대통령에서 물러난 1987년까지 삼성과 현대, 에스케이(당시 선경)와 한화(당시 한국화약) 등 43개 기업으로부터 2259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25년 뒤인 2021년 11월26일, 사망한 전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는 당시 뇌물을 준 재벌 총수 2·3세들의 근조화환이 차례로 놓였다. 현직 정치인들 대부분 조문을 꺼리고, 조화를 보내지 않는 빈소에 기업인들의 보낸 조화는 도드라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벌을 키우고, 재벌은 대가로 돈을 건넸던 과거 정경유착의 그림자가 조화에 드리운다.
‘12·12 및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권력형 부정 축재사건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보면, 전씨는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으로부터 1983년 12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8차례에 걸쳐 22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 금융·세제 운용 등 기업 경영과 관련한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삼성그룹을 선처해달라는 취지였다. 전씨는 마찬가지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부터 1982년 12월부터 1987년 12월까지 7차례에 걸쳐 220억원의 뇌물을 수수했다. 이외에도 최종현 선경 회장으로부터 150억원, 김승연 한국화약 회장으로부터 70억원을 챙겼다. 다만 기업 총수들은 5년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