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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삶

  • 김원영
  • 입력 2018.04.24 14:20
  • 수정 2018.04.24 14:21
ⓒhuffpost
ⓒLane Oatey/Blue Jean Images via Getty Images

″내가 태어나도록 그냥 두었으니 손해를 배상하시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산전진단(이른바 ‘기형아 검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신이 태어났다며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법학자들은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말 관련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 실제로는 부모가 소송을 수행하지만 아이가 원고가 된다. 같은 경우 부모가 원고로서 제기하는 소송은 ‘잘못된 출산’으로 불린다.

내 어머니도 한때는 나의 출생을 ‘손해’라 느꼈을지 모른다. 장애아의 출생은 엄청난 의료비 부담, 주위의 낙인(특히 과거에는 장애아의 출산이 여성의 부도덕이나 실수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끝없는 돌봄노동으로 점철된 삶을 상징한다. 모든 출산과 양육에는 재생산(reproduction)의 꿈이 얼마간 깃들어 있다. 자녀의 삶을 통해 부모의 꿈과 인생을 재시작한다는 관념 말이다. 생물학의 관점에서도 장애아의 출산은 양육투자는 막대한 반면 재생산의 가능성은 낮은 철저히 손해 보는 장사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과 실행에 따라 산출된 부모의 연장 또는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긴 시간 속에서 부모와 만나게 되는 별개의 인격체에 가깝다. 자녀는 출산과 동시에 부모 앞에 나타나지 않고, 점점 부모의 기대나 예상, 통제범위와는 상관없는 경로를 흘러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다양한 경험을 농축한 채 고유한 인격체로 부모 앞에 등장한다.

이 ‘만나가는’ 과정에 장애아의 출생이 스스로에게 혹은 부모에게 손해인지 여부가 달린다. 친구, 다른 친족 구성원, 이웃은 물론, 카페나 버스에서 만나는 익명의 사람들과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가 모두 이 만남에 개입한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가 카페에서 소리를 질러도 모른 척 예의바른 무관심을 보이며 책장을 넘기는 대학생. 집값이 떨어진다며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그들 앞에서 “우리 지역에 특수학교를 건립해도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또 다른 주민. 모두 부모와 자녀의 만남에 개입하는 셈이다.

2016년 잠시 일본 도쿄에 살 때 형편상 외국여행 경험이 거의 없는 부모님을 잠시 오시게 했다. 도쿄 시내를 관광하고 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유람선을 탔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당신 원영이 만나서 출세했네.” 1980년대 초 우리가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 나의 출생은 분명 얼마간 ‘손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매년 4월20일마다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선포하고 싸워왔던 장애인들 덕분에, 특수학교 건립에 반발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호소했던 다른 장애아의 부모들 덕분에, 장애인들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것이 “너희들 잘못은 아니다”라고 말해준 특수학교 시절 도덕선생님 덕분에 나는 어머니와 잘못되지 않은 존재로 결국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부모들이 반갑게 만나 세상으로 당당히 함께 나아갈 사람들은 바로 발달장애인들이다. 국가는 발달장애인을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평생에 걸쳐 체계적인 사회보장시스템으로 지원하는 책임을 기꺼이 떠안아야 한다. 신체노동보다 지식정보를 다루는 능력이 더 강조되는 시대에 발달장애인이 어떤 삶을 사는지야말로 우리 사회의 역량을 보여준다. 발달장애인과 그 부모, 이웃, 친구, 연인이 만나 말 그대로 함께 ‘출세’(出世)했을 때,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진지하게 말할 자격을 가질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잘못된 삶이란 있기 어려우므로, 부모의 죄책감도 자식의 부채의식도 모두 녹아내린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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