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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북녘과 남녘에서 모두 공연을 가진 록밴드가 있다

  • 윤인경
  • 입력 2017.06.19 12:30
  • 수정 2017.06.19 13:04

"언덕은 음악의 소리로 살아 숨쉬네

천 년 동안 불러온 노래와 함께

언덕은 음악의 소리로 내 마음을 채우네

내 마음은 들려오는 모든 노래를 부르려 하네"

다큐멘터리 '리버레이션 데이'는 라이바흐의 '사운드 오브 뮤직' 커버곡의 뮤직비디오로 시작한다. 원작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알프스 언덕 대신 한국전쟁 당시의 기록영화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자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랫말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언덕'은 국군과 인민군이 벌이던 고지전의 배경이 되고, '음악의 소리'는 포격의 굉음과 전장의 함성이 된다.

'리버레이션 데이' 공식 예고편

전형적인 라이바흐의 방식이다. 라이바흐는 오래 전부터 노랫말이 위치한 맥락을 바꾸어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방식의 커버를 즐겨 사용해왔다. 1980년 구 유고슬라비아(현 슬로베니아)에서 결성된 이 밴드에게 세계적인 인지도를 부여한 두 곡, 오퍼스의 Live Is Life퀸의 One Vision의 커버가 대표적이다. 음악의 분위기를 군국주의적으로 바꾸고 노랫말을 독일어로 번안한 것만으로 라이바흐는 원곡들의 '모두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가 얼마나 쉽게 전체주의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오퍼스의 Live Is Life

라이바흐의 Live Is Life 커버

늘 논란을 불러 일으킨 라이바흐의 독특한 '패러디' 방식의 특징은,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패러디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철저하게 패러디만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전체주의의 신봉자인 것인지 아니면 비판을 위한 패러디인지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그래서 라이바흐는 극좌와 극우 모두로부터 비난과 찬양을 동시에 받는 독특한 문화 아이콘이 됐다. 과거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을 때는 극좌파 팬과 극우파 팬들이 모두 공연장에 모였다가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

라이바흐가 2015년 평양 공연 일정의 발표와 함께 북한에서 공연한 최초의 록 밴드가 됐을 때 (나를 비롯한) 팬들은 그 절묘함에 쾌재를 불렀다. 세계 최고의 전체주의 국가, 북한만큼 라이바흐가 공연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또 어디 있을까.

노르웨이 출신으로 이전부터 북한과 여러 차례 문화교류를 해온 모르텐 트라비크가 아니었다면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공동감독이자 라이바흐의 평양 공연을 기획한 트라비크는 2014년 라이바흐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하면서 밴드와 인연을 맺었고, 이듬해 라이바흐의 평양 공연을 추진했다.

문화계에서 논쟁을 몰고 다녔던 라이바흐의 공연을 국제정치에서 늘 문제거리인 북한에서 치르는 일은 물론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음을 느낄 수 있다. 검열 담당 관료들이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의 낡은 무대 기술 때문에 라이바흐와 스탭들은 끊임없이 타협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비크와 라트비아 출신의 감독 우기스 올테는 어찌 보면 위험한 시도인 라이바흐의 북한 공연 과정을 상당히 유쾌하게 그려냈다. 아마도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껏 나온 모든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많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것이리라.

'리버레이션 데이'가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초연을 가지면서 감독과 밴드가 지난 1일 전주를 방문했다. 다큐멘터리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라이바흐는 곧바로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라이바흐는 이렇게 알게모르게 한반도의 북녘과 남녘에서 모두 공연을 가진 전무후무한 밴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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